청우헌일기

오늘이 좋다

이청산 2014. 2. 13. 14:56

오늘이 좋다
-청우헌일기·33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오르는 산이다. 매일 이맘때면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하루는 산을 오른다.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는 일이 이제는 몸의 근력만이 아니라 마음의 힘줄도 세워주는 중요한 일과가 되어 한 때라도 빠뜨리면 온 하루를 잃어버린 것 같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구르는 바퀴를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며 철 따라 새로워지는 경치를 눈에 담는 재미도 오롯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갖가지 나무들과 만나는 일도 여간 즐겁지 않다. 볼 때마다 신선하고 다감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경이며 나무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하루라도 집을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산을 오르면 나무들은 시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변함없이 나를 반긴다. 아니다. 그냥 어제처럼 서 있을 뿐이다. 뻗고 싶은 것은 뻗고, 굽고 싶은 것은 굽으면서 하늘을 향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모습들이 언제나 나를 위해 반갑게 손짓, 팔짓을 하는 것 같다.

쭉쭉 곧은 것만 있지 않고, 굽고 휘어진 모습들을 하고 있는 것이 정겹게 느껴진다. 저들끼리 무슨 희롱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엽게 아양을 떨고 우스꽝스러운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볼 때마다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곧게 뻗은 것은 뻗은 대로 좋다. 근심 없이 하늘 향해 치솟고 있는 품을 보노라면 세상에 막히고 답답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아 가슴이 참으로 청량해진다. 무슨 걱정이 속을 어지럽힐지라도 곧게 뻗은 나무 앞에 서면, 걱정은 어느 새 나무줄기를 타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리는 듯하다.

나무들이라고 재미있게 굽휘어지고, 시원스레 뻗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해충의 침해를 받았거나 설 자리를 제대로 얻지 못해 병들고 말라 죽는 것도 있고, 풍수해를 견디지 못해 꺾이고 부러진 것도 있다. 사람살이와 진배없는 그들의 한 살이가 마치 어느 이웃의 일 같이 아리게 보이기도 한다.

이 나무들을 보노라니 문득 법정 스님의 수목은 오래될수록 늠름하고 기품이 있지만, 사람은 살 만큼 살면 헌 수레와 같이 삐그덕삐그덕 고장이 많고 주책을 떨다가 추해지기 마련이다.”라고 한 말씀이 떠오른다.

사람이라고 늙으면 다 추해지고, 오래된 나무라고 다 기품이 있을까. 한 그루 우뚝한 나무 같은 삶을 살았던 법정 스님 당신처럼 맑고 향기롭게 고고해져 가는 사람들도 있고, 고목이 될수록 처연한 몰골 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나무도 없지 않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는 다 생로병사가 있을 것임에야-.

어찌하였거나 나무들은 역시 위안의 존재다.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그럽고도 아늑한 위안이 정다운 이의 포옹처럼 안겨온다.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갈지라도 묵묵하다. 그 묵묵 속에 세상사의 순명을 다 안고 있는 것 같다. 비바람의 세월을 청청한 순명으로 다 녹여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 포근한 위안으로 다가온다.

동구 앞의 노거수로 마을을 지키는 고고한 신목이 되어 서 있거나, 산자락 한 곳을 꼿꼿이 지키다가 휘어지고 꺾여 마침내는 흙이 되고 마는 것일지라도 오직 순명의 길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것이 식물적 속성이라 할지언정, 그 속성이 그립고 부러워질 때가 있다.

오늘이 좋다. 이런 나무들이 있는 산을 오를 수 있고, 나무들과 만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오늘이 좋다. 모든 걸 다 떨치고 발가벗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세상의 진정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아서 좋고, 푸른 잎 무성히 달고 있는 날, 마치 밀어를 속삭이듯 이파리를 흔드는 모습은 살가워서 더욱 좋다.

오늘 산을 오르며 이 정다운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들처럼 싱싱히 살아 있음의 확인이요, 이들에게서 정겹고 살가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의 증거가 아니랴. 그런 산을 오르는 오늘이 좋다.

늘 오늘 같은 날이고 싶다. 나무들에게서 다정을 얻고 청량감을 안는 오늘이고 싶다. 그러다가 그들처럼 묵묵 속에 순명을 녹여내는 오늘이고 싶다.

법정 스님은 또 한 소식 들려주신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스승의 대답. “시간 낭비하지 말라. 네가 숨이 멎어 무덤 속에 들어가거든 그때 가서 실컷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거라. 왜 지금 삶을 제쳐 두고 죽음에 신경을 쓰는가. 일어날 것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렇다. 오늘 날 반겨주는 나무를 보면서 산을 오를 일이지 왜 내일을 염려할까. 힘진 걸음으로 산을 오르면서 싱싱한 나무들 사이를 걸을 일이지, 그렇게 열심히 살 일이지 내일의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하려 할까. 오늘 오직 힘 다해 산을 오를 일이다.

산을 오르는 오늘이 좋다. 내일은 오늘 산과 나무에게서 얻은 기운을 품고 자전거 페달을 힘주어 밟아야겠다. 삶의 길을 힘 있게 밟아 나가듯-.(20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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