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가을 따기

이청산 2013. 11. 12. 07:24

가을 따기
-청우헌일기·31

 

아내가 또 바쁘다. 고구마와 당근은 이미 다 캤지만, 서리를 더 맞추기 전에 콩도 꺾어야 하고 배추도 알이 잘 차도록 돌봐야 한다.

고추도 따야 하지만, 약을 치지 않은 탓인지 병이 많이 들어버렸다. 그래도 병들기 전에 푸른 고추를 제법 따 먹었으니 다행이다. 아내는 무엇에라도 약을 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산밭 감나무에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텃밭만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는 아내가 놀고 있는 조그만 산밭 한 뙈기를 얻었는데, 밭에 서 있는 감나무도 하나 따라왔다. 산밭 임자가 부치는 김에 감나무도 가지라고 한 것이다.

그 밭에 콩도 넣고, 고추도 가꾸고, 고구마도 심었다. 아내는 그런 것들이 자라고 커나가는 게 보기 좋아 늘 산밭 아니면 마당 텃밭에서 살다시피 한다.

오늘은 산밭 감을 같이 따자고 했다. 이웃에 감따개를 빌려 광주리를 들고 함께 산밭으로 갔다. 마치 축제장의 붉은 장식등 같은 감이 총총 달려 있다.

감을 딴다. 공중을 쳐다보고 따려니 팔도 아프고 고개도 뻐근하다. 나지막이 달린 것은 매미채처럼 생긴 기다란 감따개를 뻗어 올려 딸 수 있지만, 높이 달린 것은 용을 써도 자라가지 않는다. 작은 사다리를 나무 밑에 받쳐 놓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우듬지 저 높은 곳에 달려 있는 것까지 따려면 가지를 딛고 오르는 수밖에 없다. 튼튼해 보이는 가지를 딛고 오른다. 한 가지를 더 올라간다. 감따개를 한껏 들어 올려 아슬아슬 감을 따는데, 밑에서 보고 있는 아내는 연신 비명을 지른다.

잠깐! 멈추라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사다리를 오른다. 자기 허리에 차고 있는 분홍색 보자기를 끌러 내 허리를 나뭇가지에 질끈 동여맨다. 주홍빛 감빛이며 푸른색 감잎과 어울린 보자기 분홍빛이 부시게 찬란하다. 감나무 가지는 잘 부러질 뿐만 아니라 미끄러지기도 쉽단다.

한참을 따다 보니 팔도 아프고 목도 빠질 듯하다. 제일 높이 달린 것은 까치밥으로 남겨 놓고 나무를 내려오니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힘은 들었지만 나무 밑을 구르고 있는 감을 보는 마음이 감빛처럼 포근하고 따뜻해지는 듯했다.

감빛이 바로 가을빛 같았다. 이만하면 아이들한테도 좀 보내고, 곶감으로 말려 두고 먹을 수도 있겠다. 감 광주리를 들고 산밭을 나선다. 포근하고 따뜻한 가을빛을 한껏 담아 밭을 내려온다.

고추가 병이 들어 딸 것이 별로 없는 것을 안 이웃이, 자기네 밭 남은 고추를 따가란다. 애써 지은 것을 우리가 어찌 딸 거냐 하니, 자기네들은 많이 땄다고, 서리 맞아 얼면 쓰지도 못한다고, 어서 빨리 따 가라고 채근한다.

아내와 이웃 밭으로 갔다. 크고 작은 고추들이 푸르고 붉은 빛을 띠고 아직도 적잖게 달려 있다. 이랑을 따라 대궁을 헤쳐 가며 고추를 따 담는다. 푸르고 붉은 인정을 따서 자루를 채운다. 순식간에 자루가 불룩해진다. 가을이 부푸는 것 같다.

둘이서 한 자루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 저 건 또 언제 저렇게 익어버렸나! 다른 것들에 손길이며 마음을 빼앗기는 사이에 담장 가에 방울토마토들이 저리 붉어 있는 줄도 몰랐다. 어떤 것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바가지를 들고 방울토마토를 따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덤불 속에도 많이 달렸다. 언제 햇볕을 받았다고 저리 붉을까. 덤불 속에 달린 것도 투명한 붉은 빛이 고왔다. 조금 덜 익은 것도 땄다. 이내 익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 안에도 이렇게 가을이 익어 있는 줄 몰랐네. 눈앞 마당에 이렇게 넉넉한 가을이 있는 줄 미처 몰랐어. 잠시간에 네댓 바가지를 땄다. 농사짓는 사람들이야 이런 걸 언제 일삼아 가꿀 겨를이나 있을까. 우리도 이웃에게 줄 게 생겼구나.

옆집, 뒷집, 또 그 뒷집, 조금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도 나누어 줄 가을이 있다니! 나누고도 많이 남았다. 이 건 또 누굴 좀 줄까? 아내의 얼굴에 토마토 빛 같은 발그레한 미소가 피어났다.

즐겁고 행복한 가을이다. 딸 것이 있는 넉넉한 가을이 즐겁다.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가을이 행복하다. 가을이 흘러간다. 광주리 속으로, 자루 속으로, 바가지 속으로 즐겁고 행복한 가을이 흘러간다. 아니다. 그것들 속으로 가을이 쌓여 간다. 따뜻하게 쌓여 간다.

즐겁고 행복한 가을 따기-.(2013.11.10.)

                                                                       

 

'청우헌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이 좋다  (0) 2014.02.13
베어진 살구나무  (0) 2013.12.09
마을 숲 인정  (0) 2013.07.14
벚꽃이 흐드러지면  (0) 2013.04.22
보치기하던 날  (0) 2013.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