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마을 숲 인정

이청산 2013. 7. 14. 22:00

마을 숲 인정
-청우헌일기·30

 

이른 아침 마을 숲에서 울려나오는 요란한 기계소리가 마을의 고요를 들깨웠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였다. 앞가리개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남정네들이 짙어진 풀숲에 예초기를 들이대며 풀들을 잠재우 듯 쓸어나갔다.

느티나무며 소나무, 팽나무 노거수가 우거져 있는 마을 숲은 동네 사람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면서 타방 사람들이 찾아와 여름날의 더위를 식히고 가는 곳이다. 객지에 나가 사는 아들딸들이 찾아와 피서를 하면서 휴가를 즐기고 가는 곳이기도 하다.

새벽 다섯 시, 이장의 방송 소리에 이른 잠을 깼다.

……어제 말씀 드린 대로 지금부터 마을 숲 정비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제초기구나 갈퀴 하나씩 들고 지금 바로 숲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휴가철에 대비하여 마을 숲을 정비한다는 것이다. 놀란 듯 일어나 장갑을 챙겨들고 마을 숲으로 갔다.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숲에 우거져 있는 잡초를 쳐 없애고, 잔디를 깎고, 길섶 화단을 다듬고 있다.

어느 한 집도 빠진 집이 없다. 집집마다 누가 나와도 한 사람씩은 다 나왔다. 다들 연장 하나씩 들고 나와 손을 모았다. 할머니들은 낫이며 호미로 길섶 화단의 잡초를 뽑고 다듬는다.

남정네들은 거의 모두 예초기를 메고 있다. 집집마다 두렁 다듬는 예초기 한 대씩은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수 농사를 짓고 있는 김 씨는 사륜 예초기를 몰고 나왔다. 유영하듯 숲을 몇 바퀴 도니, 자욱하던 풀들이 삽시간에 모두 스러져간다.

어디를 어떻게 하자거나, 어찌하라 시키는 사람도 없지만,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손길을 척척 맞추어 움직여 나간다.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했다. 예초기를 맨 사람이 풀을 베면 갈퀴를 든 사람은 긁어모은다. 누구는 손수레를 끌며 모은 풀을 실어다가 거름으로 쓸 만한 곳에 옮겨 쌓거나 적당한 곳으로 치운다.

나는 널브러진 풀을 갈퀴로 긁어 한자리에 모았다. 한참 힘주어 긁다가 보니 온몸에 땀이 젖어왔다. 잠시 허리를 펴서 이마의 땀을 닦는데-. , 조 씨가 양쪽에 목발을 짚은 채 한 손으로 빗자루를 잡고 어질러진 길을 쓸고 있다. 하체를 온전히 쓸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하고 사는 조씨가-. 이런 일에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는데-.

수고하십니다!” 손을 흔드니, 그가 빙그레 웃는다. “뭘요!”

안 나와도 되는데, 왜 나왔느냐?’, 그에게 누구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 주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고자 하는 조 씨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할 따름이다. 함께 참여하는 걸 즐거워하는 조 씨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몇 사람은 강둑으로 올라가 언덕바지를 덮고 있는 잡초를 깎거나 베어내고, 나무들의 잔가지를 쳐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레탄이 깔린 숲 속의 조그만 운동장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동네 어귀 길을 빗자루를 모아 다시 쓴다.

숲이며 강둑이 말끔하고도 단정하게 다듬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거리가 적고 작아서가 아니라, 모은 마음들이 많고 컸기 때문이다. 일을 끝낸 사람들은 모두들 이마를 흘러내리고 있는 땀을 닦으며, 서로 수고했다는 위로의 인사를 건넨다.

얼매나 마음이 잘 맞노! 우리 동네 살만하지요?” 다들 들으라는 듯 이장이 외친다.

잘 안 맞으면 우짤 긴데! 하하하-” 모두들 큰 소리를 내어 웃는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회관 앞 정자에 모두 모여 앉았다. 부인네들 몇 사람이 아침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누구 집에서 닭을 내고, 누구 집에서 쌀을 내었다며 닭죽을 맛있게 끓여 놓았단다. 닭은 어제부터 고았다고 한다.

큰 대접에 가득 떠서 모두 한 그릇씩 안긴다. 땀 흘린 이른 아침에 잘 고아서 끓인 죽에다가 적당히 간을 쳐서 김치를 곁들여 먹는 맛이란, 세상의 어떤 요리가 이보다 보다 더 맛날까. 음식이 내는 맛만은 아니었다. 정성의 맛이고, 인정의 맛이었다.

, 한 잔 합시다! 땀 흘렸으면 한 잔 해야지!” 술을 좋아하는 김 씨의 술잔은 아침나절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오면 얼매나 좋아 하겠노?” 앞장서 닭죽을 장만한 오천 할매는 휴가 때 대처에 나가있는 손주들이 와서 숲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그리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잘 먹었습니다. 인제 모두 일하러 가야지-” 막걸리 한 잔을 시원스레 들이킨 김 씨가 먼저 일어선다.

연장들을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들이 가볍다.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흰 구름처럼-.(201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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