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봄이 오는 한촌

이청산 2013. 3. 31. 15:45

봄이 오는 한촌

 

마을회관의 문을 닫았다. 추수 끝낸 가을에 열었었다. 지난겨울의 회관은 참 따뜻했었다. 방도 따뜻했지만, 그 방에 모이는 마음들이 더 따뜻했다.

된장이야 고추장이야, 채소야 나물이야 조금씩 가져와 모둠밥을 해먹으며 인심을 나누기도 하고, 객지로 아이들 다 내보낸 적요를 서로 위로해주며 인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보내온 과일이며 찬거리를 서로 나누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부모는 뭘 그러느냐.’고 얼굴이 발그레해지기도 했다.

동짓날은 동지팥죽을 갈라먹고, 설날엔 떡국이며 강정을 나누어 먹고, 대보름 동제 마치고는 제수 음복 함께 하며 거방진 윷놀이 판으로 한 해의 복을 부르기도 했다.

봄의 들머리 삼월 초입에는 대처 어느 고마운 치과에서 나온 의료 봉사에 노인네들 해묵은 치통을 다스리며 참 살만한 세상이라고 했다.

모두 마을회관에서 피어난 따뜻한 일들이었다. 가을을 기약하며 그 회관이 문을 닫았다. 따뜻함을 사려 안고 일어나 맞이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봄을 맞이해야 했다. 회관에서 따뜻한 마음들을 나누고 있던 사이에 뒷산 자락의 생강나무는 벌써 꽃을 피웠다. 쑥이 파란 싹을 내밀고 냉이가 살져갔다.

할매들은 바구니를 들고 강둑으로 논두렁으로 나물 캐러 가고, 남정네들은 기계 부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 추수 후에 미처 걷어내지 못한 논바닥의 짚을 집초기며 베일러가 와서 걷어내어 갔다. 그 자리에 경운기 한가득 실어온 거름을 뿌렸다.

조 씨는 그 너른 논을 며칠을 두고 혼자 갈아엎었다. 옛날처럼 소 부려서 갈기보다는 좀 낫겠지만 기계를 부려 논을 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김 씨네 사과 묘목 농장에서는 인부와 기계를 동원하여 묘목을 모두 뽑았다. 기계가 뽑고 사람들이 추려 묶었다. 장에 내다 팔 것이라 한다.

이 씨는 밭을 갈아 부부 함께 손을 모아 또박또박 감자 씨를 넣고 있다. 호박씨도 곧 묻어야 할 것이라 한다.

그 사이에 논두렁에는 꽃다지가 흐드러지고, 산자락 바위틈엔 제비꽃이 조그만 얼굴을 내밀고, 옆집 담장 곁에는 산수유 노란 꽃이 봉오리를 한껏 터뜨렸다.

새들이 부르는 노래일까, 바람이 엮어내는 소리일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옛 노래 하나가 들판으로 퍼져나갔다.

 

  먼 산의 아지랑이 품 안에 잠자고

  산골짝에 흐르는 물 또 다시 흐른다.

  고목에도 잎이 피고 벌 나비도 춤을 추는데

  내 동무는 봄이 온 줄 왜 모르시나요?

 

노래처럼 들판에는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산골짝 물소리는 한층 맑고 높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동무는 어디에서 이 봄을 맞고 있을까?

아직은 우리에게 봄은 좀 더 가까이 와야 한다. 산에는 온갖 산꽃이며 진달래가 활짝 피어야 하고, 강둑에는 줄지어선 벚나무가 꽃 이파리를 찬란하게 날려야 한다.

그 때 이장은 봇물을 트러 수문으로 달려가야 하고, 수로엔 맑은 물이 넘실 흘러야 한다. 수문이 열리고 통수가 되는 날은 망두걸에 모여 막걸리 잔이라도 들어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일 끝낸 해거름이면 고샅 어귀의 쉼터 망두걸에 모이게 될 것이다. 누구 논에 물을 대고 기계를 품사서 써레질을 한 이야기며, 어디 가서 무슨 나물을 캐고 뜯은 이야기들이 흐드러지게 될 것이다. 어느 집 대처 며느리가 달덩이 같은 애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나올까.

누구는 방금 뜯은 나물로 전을 부쳐오고, 누구는 겨우내 띄워두었던 술을 내올 것이다. 오천할매는 풀꽃반지를 자랑하고, 원골할배는 호옹도야 우지 마라 옵빠가~~~’를 목청 높여 뽑을 것이다.

 

 누가 우리 살림살이 가난하다더냐?  (誰謂吾生窶 수위오생구)

 봄 되면 모든 것이 기이한 것을.       (春來事事奇 춘래사사기)
   산에서는 붉은 비단 병풍을 치고      (山鋪紅錦障 산포홍금장)
   하늘은 푸른 비단 휘장을 친다.        (天作碧羅帷 천작벽라유)

       -김성일(金誠一·1538~1593), 봄날 성산에서 (春日城山偶書)

 

 누가 이 봄을 가난하다고 하랴, 모든 것이 꽃 같은 인정이 되어 넘쳐날 것을!

주지봉 자락엔 핏빛 같은 진달래가 터질 듯 붉고, 시리게 푸른 하늘로 종다리 소리 돋워 날아오를 것을! 봄이 오는 한촌의 날에-.(201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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