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대마도여 잘 있거라

이청산 2013. 3. 16. 19:57

대마도여 잘 있거라

 

대마도를 다녀왔다.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하룻밤을 자고 오는 일정이었다. 한촌을 살기 시작하면서 참여한 산악회는 육십 대와 칠십 대로 구성된 지역 사람들의 친목 단체다. 나처럼 한 생애를 마감하고 두그루부치기로 사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거의가 농사를 짓는 틈틈이 겨를을 지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산행을 하는 중에 큰마음 먹고 바다를 건너 대마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등산과 관광을 겸해서 그곳의 이름난 산이라는 아리아케산(有明山)을 오르고 몇 곳의 풍치를 둘러보고 올 계획으로 겨울 추위가 덜 가신 삼월 초 어느 날 미명의 새벽을 나섰다.

세 시간 남짓 달려 부산의 국제여객터미널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달려 나갔다. 부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한 시간 남짓한 항해로 목적지에 닿았다.

히타카즈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마치고 터미널을 나서니 점심나절이 되었다. 관광객들이 붐볐다. 대마도는 한국 사람들 덕분에 산다는 안내자의 말마따나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다. ‘관광안내센터를 비롯해 항구 주변 업소는 거의 한국어 간판을 달고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음식점에서 초밥에 우동으로 점심을 먹고 대마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는 이즈하라를 향해 달린다. 마을을 지나고 해안을 거쳐서 협곡을 달려가는데 대부분이 산악지대다. 대마도는 전체 709의 면적에 89%가 울창한 산림 지역이라 한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에는 무성한 후박나무와 죽죽 뻗은 삼나무가 우거져 있고, 가끔씩 보이는 농가 마을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인적이 감감하다.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이즈하라 고려문(高麗門) 앞에 닿았다. 에도시대(1600~1868)에 일본을 방문하는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세운 문이라 하건만, 안내자는 문 옆을 지나 올라가면 아리아케산으로 간다고만 안내할 뿐이다.

이즈하라에 비운의 조선 왕녀 덕혜옹주며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의 자취도 있다는데, 언제 볼 거냐고 안내자에게 물었더니, 있기는 하지만 여정에는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시골 노인네들의 관심사를 배려한 것일까, 가볍게 여긴 것일까, 혼자서라도 찾아보리라 마음먹고 우선 일행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고려문 앞을 지나니 문득 조선통신사의 비가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간 조선의 사절단이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 간의 우호적인 교류를 증진한 것을 기려 양국이 합동으로 세운 빗돌이다. 이러한 선린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독도며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경색을 면치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사적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한글 안내문을 씁쓸히 곁눈질하며 비탈에 자리 잡은 인가를 지나 산길로 들었다. 몇 걸음 오르니 이즈하라 시가지가 한눈에 드는데 울릉도의 도동 풍경을 연상케 했다.

해발 558m의 산길을 오르면서 보니, 곧게 죽죽 뻗은 삼나무가 울창한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지만, 식생이며 토질은 마치 울릉도 성인봉의 것과 흡사했다. 굽이진 가풀막을 힘주어 올라 정상에 이르니, 마른 갈대가 우거진 평원 능선이 찾는 이를 맞이하고 있다. 멀리로 보이는 산정 몇 곳과 함께 주변의 수풀만 시야를 채울 뿐, 울릉도 성인봉과는 달리 섬의 둘레 풍치는 보이지 않는다.

내림 길을 재촉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 봐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면서 다시 고려문을 지나는데, 문 옆의 빗돌 하나가 번쩍 눈에 들어왔다.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 현창비다. 아메노모리호슈(16681755)는 에도시대의 대마도 사람으로 한국과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성심으로 교류하기'를 강조하며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을 주창했던 친한파 외교가다.

마성중학교에 재직할 때, 한일 교류행사에서 칙코중학교 마키다 교장으로부터 이야기도 듣고, 오만(吳滿) 대판경제법과대 교수로부터 그의 저서 <日韓のかけ橋 雨森芳洲>도 증정 받은 기억이 떠올라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듯 반가웠다. 그는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이자 교육자로 <交隣須知>라는 일본 최초의 한국어 학습교재를 펴내기도 했다고 한다.

현해탄의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는 요즈음에도 이런 외교관이 있다면, 한일 관계도 훨씬 부드러울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뜻을 같이하는 일행 한 분과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찾아갔다. 일행이 산을 다 내려오기 전에 찾아봐야 한다.

고종과 후궁 양귀인 사이에 태어난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19315월 대마도주의 후예인 소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한 사실을 기린 기념비는 고려문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가네시(金石) 옛 성문을 지나서 쓰시마 번주(藩主) 소유케(宗家) 묘소인 반쇼인(万松院)에 있는 <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라는 명문을 새긴 기념비를 보는 순간, 덕혜옹주의 고뇌에 찼던 파란의 생애가 떠오르면서 눈동자부터 먼저 젖어왔다.

고종이 승하한 후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와 귀족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해가며 어렵게 수학하다가 졸업 후에는 일본 귀족의 후예와 강제 결혼을 한다. 결혼 2년 뒤에 딸을 얻었으나 어릴 적에 얻었던 정신질환이 재발하여 고통과 수모를 겪다가, 1955년 이혼이라는 비극에 처하게 된다. 1962년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곤고한 여생을 보내다가, 1989년 우리나라 근대사의 비극을 한 몸에 안고 한 많은 세상을 마치게 된다.

2001년 일본측과 한국측의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하며 비를 세운다.’고 비기(碑記)는 말하고 있지만,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나라의 아픈 현실만 떠올리게 할 뿐이다.

덕혜옹주의 비극적 생애와 두 나라의 현실에 대한 아린 마음을 서서히 내려앉는 땅거미에 묻으며 가네시성터를 나서니 산에서 내려온 일행들이 대기 중인 버스에 오르고 있다. 다음은 대마도 역사자료관 관람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만찬 시간을 맞추기 바빠 그냥 스쳐 간다고 하니 아무도 의의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일행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호기 서린 마음을 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식당에 들어 해물바비큐라는 것으로 이국 여로의 별미를 새기고 20여 분 차를 달려 만제키다리가 보이는 해안의 어느 다다미방 민숙(民宿)에서 객창의 하룻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첫 일정으로 이즈하라 번화가에 있는 면세점에서 쇼핑을 할 것이라 했다. 호기회라 생각하며 차가 멎는 면세점 앞에 내렸다. 일행의 쇼핑 틈을 타서 어제 덕혜옹주를 함께 찾았던 회원과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찾아보기로 했다. 또 한 회원이 뒤따랐다.

시가지 뒷골목을 굽어들어 찾아간 곳은 백제의 비구니 법묘(法妙)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는 사찰인 슈젠지(修善寺)였다. 돌계단을 올라 고색 짙은 절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에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 새긴 화강암 비석이 두 층의 기단 위에 서 있다. 최익현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일 공동으로 1986년에 세운 비석이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은 한말의 대유학자요, 애국지사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로 유배된다. 그는 원수의 밥을 먹지 않으리라 하며 단식을 하다가 1906년 순국한다. 슈젠지에 유골을 안치했다가 부산으로 운구하니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와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이 찾아와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디 메에 임의 뼈를 묻어오리."라며 시절을 절규하는 만사(輓詞)를 남기기도 했다. 선생은 한일합방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節命詩)를 남기고 자결한 분이다.

대쪽 같이 곧고 푸른 그 절개와 애국의 충정 앞에서, 이 같은 나라와 백성 사랑으로 열정을 태울 이 오늘날엔 뉘 있을까 생각하니 입매가 홀연 갑갑해진다. 그 충렬 앞에 오히려 서늘해진 가슴을 쓸며 망자의 묘비로 가득 찬 경내를 잠시 둘러보고 슈젠지를 나오는데, ! 선생의 영전에 추모의 정을 올리지 못했구나. 경솔을 부끄러워하며 골목 어귀에서나마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송구한 마음으로 경모의 뜻을 받들었다.

일행이 머물고 있는 면세점으로 오니 쇼핑이 마침 끝날 무렵이라 이즈하라를 떠나 다시 히타카즈로 향하려는 차에 함께 올랐다. 귀로를 달려 나간다.

타원형의 붉은 철구조물이 다리를 덮고 있는 만제키다리(万關橋)를 건넌다.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지만 옛 일본 해군이 군함의 편리한 출입을 위해 인공의 운하를 뚫어 지름길을 만들면서 바다 위 길을 이으려고 놓은 다리라 한다. 차에서 내려 다리를 걸으면서 아소만의 풍경을 감상하라 한다. 부드러운 산세에 안겨 펼쳐진 아소만의 고요한 풍경이 때마침 물살을 하얗게 가르며 다리 아래를 달려 나가는 쾌속정 뱃머리로 고즈넉이 감겨든다.

달리던 차가 울창한 숲이 도열한 협곡을 지나 사행의 굽이진 길을 갈지자로 올라 이른 곳이 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다. 망루에 오르니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는데, 모두 109개나 된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남해 어디쯤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이리 많은 섬을 두고도 남의 나라 섬까지 탐을 내는 사람들의 심보는 무엇일까.

바람 세찬 망루를 내려와 비탈길을 타고 내려 이른 곳은 와타즈미(和多都美)신사다. 바다 속에 두 개, 땅 위에 세 개, 모두 다섯 개의 신사문(神社門)으로 해신을 불러 바다 생활의 안녕을 비는 해궁이라 하는데, 어귀에 서있는 황태자 덕인친왕의 결혼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신사 안에는 소원을 적는 나무판이 걸린 게시대를 세워 놓았는데, ‘독도는 한국 땅 대마도도 한국 땅이라 적은 나무판이 미소를 머금게 했다.

다시 차를 달려 정오가 넘어서 이른 곳이 마지막 여정인 한국전망대다. 대마도는 부산과 불과 49.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좋으면 거제도며 부산을 볼 수 있다는 곳이다. 하늘이 쾌청치 못해 볼 수는 없었지만, 독도와 제일 가깝다는 오끼군도와는 157.5km나 거리를 두고 있어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군상들이 이 가까운 대마도는 어찌 당당한 자기네 땅이라 한단 말인가. 역사를 상고하더라도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오, 우리와 친숙한 땅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닌 현실을 애석해하며 전망대를 내려오노라니 문득 눈길을 잡는 커다란 비석 하나, <朝鮮國譯官使 殉難之碑>. 비기(碑記)는 조선 숙종29(1703) 25일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한천석(韓天錫) 이하 108명의 조선 역관 일행이 저녁 무렵 대마도 와니우리(鰐浦)에 입항하기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들은 대마도 제3대 번주(藩主) 종의진(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번주인 제5대 종의방(宗義方)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이었다. 양국 간 선린우호의 사명을 수행하다가 불운을 당하니 실로 애통한 죽음이라 할 것이다.

그 안타까운 죽음을 뒤로 하고 히타카즈항을 향하여 달린다. 대마도를 떠나야 할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항구의 어느 음식점에 들어 우동으로 점심을 때우고 여객터미널로 가서 출국 수속을 한다. 그리고 조국으로 가는 연락선을 탄다.

등행 산길에 대한 기억과 몇 장면의 풍경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인 여정에서 두어 역사적 사실을 건진 것은 다행이라 하련만, 비극적인 역사만을 목도한 것 같아 해협을 건너는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고난과 희생 위에 세워져 온 것에 생각을 모아보면, 대마도에 깃들인 우리 역사의 비극이 오늘의 우리 조국을 이루어온 한 동량이 되었을 것이라는 상념이 아린 마음에 위안으로 들어앉는다.

대마도여, 잘 있거라. 우리와 함께 엮은 역사의 빛줄기는 빛줄기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보듬어 간직하면서 평화를 함께 할 그날까지 잘 있거라, 대마도여!

선창에 부서지는 파도가 축복의 꽃가루가 될 때까지, 대마도여!(201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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