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누이의 취임

이청산 2013. 2. 28. 15:29

누이의 취임

 

……그동안 말 못할 어려움도 참 많았습니다만, 살아올수록 농업만이 인간의 참살이를 위한 진정한 대안임을 깨닫고, …… 생활개선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누이가 도 단위 회장으로 취임했다. 취임사를 해나가는 누이는 깊은 감회에 젖는 듯했다.

누이는 오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넷째인 나와는 여덟 살 터울이다. 누이가 중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에 부모님은 이미 생활 일선에서 물러나 계셨고, 큰오라버니의 그늘에서 학업을 치러야 했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의 꿈을 뒤로 한 채 직장 생활로 들었다. 그리고 건실한 청년을 만나 시집을 갔다.

도시에서 자리 잡고 살던 청년은 시골 부모님의 살림을 이어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 제 처를 데리고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두메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 길로 누이는 시골 아낙네가 되어가야 했지만, 벼 보리가 나는 논밭을 별로 본 일 없이 자라온 누이였다. 더욱이 농촌의 일은 어떠하며 시골 살림살이는 어떠해야 하는지 알 리가 만무했다.

어쩌다 누이가 사는 시골로 찾아가면 얼굴은 새카맣게 타 있었고, 사는 모습을 보고 돌아올 때면 잘 가라며 손 흔드는 누이의 얼굴에 물기 젖은 눈동자가 비치곤 했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매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삶이 참 곤비할 것이라 짐작할 뿐, 누이는 힘들고 어렵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들 남매가 태어나고, 그것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세월이 흘러갔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지난날 살았던 도시에 조그만 아파트도 마련했다. 간혹 누이가 사는 곳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누이가 아이들이 있는 도시에 나오기도 했다. 그 때 누이의 얼굴에는 조금씩 웃음꽃이 피기도 하고, 농사일에 대해 제법 아는 듯한 이야기도 했다.

제법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을 부녀회 일도 보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도 한다고 했다. 마을 일만 하는 게 아니었다. 면 부녀회 일을 책임지고 해나간다더니, 어느 새 군 단위 단체의 일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간다기도 했다.

농촌 생활개선에 관한 일을 한다고 했다. 농사일이며 시골 살림살이를 어찌하면 좀 더 생산적이고 능률적으로 할 수 있는가, 편리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가. 이웃 간에 서로 도와가며 화목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 했다.

막내로 어렵게 자란 누이가 그런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기만 했다. 살림살이에 골몰하는 일은 물론이고 매부와 함께 논밭으로 나가 손발이 갈라지도록 일을 해나가면서, 언제 그렇게 이웃의 일들까지 돌보는 일을 할 수 있었던가. 그것은 누이에게 일어난 기적 같기도 했다.

기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린 막내로만 여겼던 누이가 오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경륜을 쌓아가는 사이에 활동의 폭은 점점 넓어져 갔고, 서서히 농촌여성운동가로서의 평판과 명성을 함께 쌓아갔다.

간병사, 요양보호사, 웃음치료사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여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들이 알게 모르게 알려지면서 여러 기관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고, 농사도 열심히 잘 지었다고 도지사가 수여하는 여성농어업인대상을 받기도 했다.

드디어 생활개선연합회 도 단위 회장으로 추대 받기에 이르렀다. 농업인회관에서 베풀어진 취임식에는 회원들은 물론 도지사며 도의원, 각시군 농업기술센터 소장들이 하객으로 참석하여 식장을 메웠다. 누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군수도 참석했다.

떠나는 회장단이 이임 인사를 하고, 새 임원진의 소개에 이어 누이가 연단에 섰다. 자신의 생애에서 낯설기만 했던 농촌으로 시집 와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이며 앞으로의 포부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만감이 얽힌 감회와 함께 결기에 찬 의지를 드러냈다.

도지사가 등장하여 살기 좋은 농촌 환경 조성을 위한 여성농업인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그간 누이가 해온 여러 가지 활동을 치하하고 격려하면서 취임을 축하했다. 도의회 농수산위원장, 군수의 축사가 이어졌는데, 누이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군수는 누이의 활약상과 함께 성실히 외조해온 매부의 덕을 칭송하기도 했다.

축하 떡을 자르고 회가를 합창하는 것으로 취임식은 마무리 져갔지만 함성과 박수소리는 오래도록 식장을 떠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누이에게 달려와 꽃다발을 안기며 취임을 축하하고 앞날을 축복했다.

이제 누이는 다시 삶의 터, 그 두메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일은 또 들로 나가 땀 흘리며 하우스의 작물을 돌보거나, 바쁜 시간을 쪼개어 크고 작은 회의에 참석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로 달려 갈 것이다.

누이의 그렇게 쏟는 힘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고단으로 이겨내야 했던 학창시절이며 젊은 시절의 고뇌들이 반면교사가 된 것일까? 못다 이룬 배움에 대한 갈증이 오히려 여러 가지 사회 활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된 것일까? 아무 것도 모르는 체 맞이해야 했던 농촌 생활, 그 생활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신념이 크고 많은 일들을 해내게 한 것일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누이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누이는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을 용기와 희망으로 바꾸면서, 그리고 그 용기와 희망을 자기를 다스리는 일에만 쓰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펼쳐나간 것이다.

이제 누이는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누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신념을 더욱 원숙하게 갈무리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자신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더욱 보람된 빛을 밝혀 나갈 것이다.

취임식의 모든 절차가 끝났다. 누이가 축하와 축원의 열기를 안고 식장을 나설 때, 파란 하늘에서 내려앉은 햇살이 회관 마당을 맑고 곱게 무늬 짓고 있었다. 마치 연단에서 짓던 누이의 미소같이-.(201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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