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안경을 잃고

이청산 2013. 2. 13. 15:47

안경을 잃고

 

문득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이 쓴 <조침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혼절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들 속절없고 하릴없다…….”

이십칠 년간이나 애지중지하며 써 오던 바늘을 바느질 중에 부러뜨리고 너무도 애틋하여 그 애통한 마음을 제문 형식에 담아서 쓴 글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마음을 무엇으로 빻는 듯하고, 머리가 깨어지는 듯하다고 했을까. 숨이 막혀 까무러치기까지 했을까.

한 여인의 그 슬프고도 아린 심정이 백 수십 년 세월의 강을 건너와 오늘 나의 심장 속으로 들어와 박혔다. 대상과 용도가 다를 뿐 심사는 그리도 같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공이로 절구를 치듯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하고, 머리가 조각조각 갈라지는 듯 생각이 어지럽다.

안경을 잃어버렸다. 나들이할 때 늘 품고 다니면서 작은 것들을 읽고 볼 때 쓰는 조그만 것이었다. 별로 값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십 수 년을 두고 내 품에서, 내 망막 위에서 안내자가 되고 친구가 되던 것이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 걸까. 지나치고 스쳐온 곳을 다시 찾아 살펴보고, 머물렀던 곳이며 앉았던 곳을 눈을 닦으며 뒤져봐도 도무지 종적을 가늠할 수가 없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 그렇구나, 거기겠구나. 내가 탔던 버스 안-. 그 때 입었던 윗마기의 안주머니가 마땅치 않아 비스듬히 달려있는 겉주머니에 넣었었는데, 자리에 앉아 움직이는 사이에 주머니를 빠져나가 버렸구나.

자리에 떨어진 줄도 모르고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덜렁 내려버린 것 같다. 그 차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으며, 찾아낸들 그 자리에 있기나 할까. 정말 속절없고 하릴없다. 나의 덩둘한 품새가 가슴을 아프게 찔러올 뿐이다.

그것과 함께 했던 수많은 세월이 되살아나 흉중이며 뇌리를 아리게 흘러간다.

세월의 흐름은 눈앞에 보이는 모습들을 돋우어 보이게 하는 그것을 필요로 하게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것이 내 품에 다소곳이 들어앉았다. 그것이 없이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늘어만 가는 세월을 따라 그것과 점점 친해지고 정도 깊어져 갔다. 어쩌면 세월이 빠져 나가는 자리를 그것이 메워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을 나설 때면 그것은 언제나 윗옷의 안주머니에 어김없이 꽂힌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을 어디든 함께 간다. 여행도 가고 출장도 간다. 한 때는 여행보다 출장을 많이 갔던 시절도 있었다.

출장은 주로 회의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촘촘히 적힌 회의서류의 글자들을 나의 눈 속에 머릿속에 다 넣어 주었다. 나에게로 들어온 글자들은 나의 의견이 되어 다시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러한 나의 삶을 수행하게 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출장은 각종 연수에 참가하는 일이다소소한 소양 연수도 있지만, 중요한 자격을 얻는 연수도 있었다. 연수 자료를 읽어주고, 공부도 하게하고, 시험도 치게 했다. 그 공부와 시험에 따라 삶의 모습과 위치가 달라지게도 했다.

오늘날 나의 삶의 모습은 어쩌면 그것이 이루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게 없었다면 무엇으로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출장을 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연수회에 참가해야 했던 시절이 흘러가고 난 뒤에도, 나를 위한 그것의 역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오히려 그것에 의지할 일이 많아져 가기만 했다.

박물관에도 가야하고, 문학관에도 가야했다. 어딜 가더라도 집을 나설 때는 맨 먼저 챙겨야 하는 그것이지만, 여러 가지 전시관에 가는 날이면 혹시나 빠뜨릴까 싶어 조바심하며 챙겨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박물관에서 역사적인 사물들의 역사와 유서를 빽빽하게 새겨 설명해 놓은 글들을 그것이 아니면 무엇으로 눈 속에 넣을 수 있었으랴, 비단 글들 만이랴. 무엇인들 자세히 보려하면 그것이 없어 될 일이던가.

조병화문학관에 가면 자잘한 글자로 적힌 그의 시들이 온 벽면을 장식하고 있고, 이육사문학관에 가면 시인들의 육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그 문학관에서 문학가의 생애에 관련한 자료와 여러 가지 글들을 그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무엇으로 감동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곧 세상과 나를 맺어주는, 내가 세상 속으로 들게 하고. 세상이 나에게 오게 하는 든든한 끈이요, 다리였다. 그 끈을 잡고, 그 다리를 건너 나는 세상을 살 수 있지 않았던가. 삶의 끈이 끊어진 듯, 생애의 다리가 무너진 듯-.

내 아끼던 그것이 뉘 손에라도 들어 긴요히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누구 손에 든들 내 손때 묻은 그것을 나처럼이야 귀히 여길까. 생각할수록 민망하고, 무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호 애재라, 내 안경이여! 그토록 생광스러운 것을 무람치 못하게도 허투루 놓아버리다니! 더 좋은 것을 맞추어 품에 품을 수 있고 얼굴에 얹을 수 있다한 들, 그간의 인연이며, 정리를 어찌 다 거두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신중치 못한 내 처신이 아프게 돌아 보일 뿐, 누구를 한탄하고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모든 일에 조신한 마음을 늦추지 말아 남은 생애에 다시는 그런 애틋한 일 없이 하기를 애쓸 일 말고는 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얼마를 더 살아야 뉘우침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새로운 다짐을 하지 않아도 안타까울 일 없는 생애를 갈무리해 나갈 수 있을까.

잘 가거라, 안경이여! 손잡아 세상으로 끌어내어주던 내 고마운 안경이여!(201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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