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한촌의 어느 하루

이청산 2012. 1. 22. 15:23

한촌의 어느 하루
-청우헌 일기·16


숲속 길은 험했다. 한겨울이라 넝쿨이며 풀들은 바짝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발길을 훼방하고 있었고, 가시를 단 마른 나뭇가지들이 옷이며 살갗을 찔러왔다.

어느 날 이웃에 기계톱을 빌려 들고 산길을 올라갔다. 언젠가의 폭풍우로 넘어진 커다란 낙엽송 한 그루가 가끔씩 다니는 등산로를 턱 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중동 둥치를 잘라내어 길을 틔웠다. 한 토막을 자르고 보니, 마당에 솥을 걸어놓고 나물이나 고기를 삶는 아내의 모습이 생각났다. 장작불이 훨훨 타는 아궁이 모습이 떠올랐다. 몇 토막을 더 잘랐다. 요란한 기계 소리에 새들이 다 날아갔다. 아, 그런데 가져갈 방법이 없었다. 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두고 궁리해 보리라 하고 숲길을 내려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이웃에 손수레를 빌려 숲으로 향했다. 지게는 어느 집에도 없었다. 요새 누가 지게 지는 사람이 있느냐고 했다. 지게가 있다고 해도 지게를 져 본 적이 없지만. 숲길 어귀에 수레를 대어놓고 한 토막씩이라도 들고 날라 수레에 실으리라 생각했다. 수레를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수레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끌고 갔다. 그래도 베어 놓은 등걸이 있는 곳까지는 한참 남았다. 우선 수레를 세워놓고 등걸 쪽으로 갔다. 하나씩 들어 나르기엔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몇 둥치를 한데 묶었다. 그리고 끌었다. 그루터기에 걸리고 덤불에 걸려 잘 따라 오지 않았다. 힘 다해 당겨 끌다가 내리막을 만나서는 하나씩 아래로 굴렸다. 수풀 속으로 들어간 등걸을 꺼내려다 가시에 긁히기도 했다. 그렇게 여남은 토막을 옮기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수레에 실었다. 끌고 숲을 벗어나는 게 문제였다. 무게를 감당 못해 이리 뒤뚱 저리 뒤뚱거리다가 급기야는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풀어헤쳐 반만 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숲길 어귀로 옮기고 다시 반을 실어 옮겼다. 숲을 벗어나서는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잘 포장된 농로가 있기 때문이다. 몸속에 있던 힘이 등걸에게로 다 빠져 나가버린 뒤였다. 어느새 한 나절이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는 좀 쉴까하여 책상에 앉아 홈페이지나 들여다보려는데, 이웃이 고기를 잡으러 강에 가자고 했다. 이 겨울에 어떻게 고기를 잡느냐 하니, 방법이 있으니 거저 몸만 오라 했다. 강으로 가니 이웃이 먼저 나와 고기를 잡고 있었다. 무슨 물장난을 저리하고 있는가. 커다란 해머를 들어 물을 내리찍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얼 주섬주섬 줍는가 싶더니 받으라면서 물가로 툭툭 던져내는데, 살아서 팔딱 뛰고 있는 고기들이었다. 주어 담기가 바쁘게 던져냈다. 계속 내리치는데 물을 치는 게 아니라 물속의 큰 돌들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면 돌 틈에 있던 고기가 놀라 잠시 기절을 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얼른 주어 던지는 것이다. 한참 그렇게 하는 사이에 두어 사발 가량이 잡혔다. 고기는 망태기 안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묵직한 망태기를 든 채 이웃의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옅은 땅거미가 동네를 덮어가고 있었다.

이웃은 고기를 잡는 게 재미있어 잡았을 뿐이라며 망태기 째로 다 주었다. 수도 가에 헤쳐 놓고 손질을 하다가 보니 뿌구리란 놈이 피리를 물고 꿈틀거리고 있다. 한 물에 놀면서도 저렇게 물고 물리고 하는구나. 하기야 어느 세상인들 서로 살겠다고 물고 뜯고 할 존재들이 없을까. 손질을 하고 있는 중에 이웃에서 두부를 빚었다며 큰 모 하나와 순두부를 들고 왔다. 서로 나누면서 살려는 이웃이 있는 우리 마을은 참 정겨운 곳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아내는 손질한 물고기를 냄비에 담고, 고춧가루며 마늘이며 갖은 양념을 넣어 조림을 만들었다. 아내가 조리를 하고 있을 동안에 고기를 잡은 이웃을 비롯하여 다른 이웃들을 불렀다. 몇 사람이 왔다. 물고기 요리를 안주로 막걸리 잔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환담을 나누는 사이에 한촌의 겨울밤이 따뜻하게 깊어갔다. 웃음으로 나누는 이야기들이며, 물고기조림 위에 얹힌 빨간 양념이 겨울밤을 발갛게 데우는 잉걸불 같았다.

글자 하나 눈에 넣지 않고 책장 한 장 넘기지 않고 흘러간 하루였지만, 문장으로 책으로 겪을 수 없는 일들을 읽고 느낀 하루였다. 언제 내가 땔감을 위하여 땀을 흘려 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 내가 천렵으로 이웃과 정을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한촌의 어느 하루-. 이런 일들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범상할 뿐인 하루가, 나에게는 참 유별하게 느껴진다. 산이며 물이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날이라 할까. 내가 그들에게로 한 발짝 다가선 날이라 할까.♣(201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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