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시산제(始山祭)의 하늘

이청산 2012. 1. 14. 10:45

시산제(始山祭)의 하늘
-청우헌 일기·15


 

유세차(維歲次) 서기2012112…… 경북 문경시 마성면 어룡산악회장 김기정은 신령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신령(神靈)님은 만지만능하신 힘으로…… 임진년 한 해에도 굽어 살펴 주소서…… 돈수재배로 분향강신하오니 흠향하소서.”

축관을 맡은 총무께서 카랑한 목소리로 축문을 읽어 나가는데, 올 한 해에도 굽어 살피시어 무사 산행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대목에 가서는 목소리가 더욱 고조되어 갔다.

작약산 수정봉(486.5m)이 품도 점잖게 인간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휴양림 잔디밭에 상이 차려졌다. 커다란 돼지머리와 떡판이 놓이고, 조율이시 갖은 과일이 차려졌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제주이신 회장께서 강신례를 드린다. 회원들은 뒷전에 묵연히 둘러섰다. 집사에게 잔을 받은 제주는 금일봉을 돼지 입에 물린 뒤 재배로 초헌례를 드리고, 무릎을 꿇고서 엎드린다. 축관이 축문을 읽어나가자 회원들은 모두 공읍(拱揖)하듯 손을 모아잡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인다. 올 한 해의 산행이 오늘 시산제의 축문처럼 이루지기를 축수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환갑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들이 모인 산악회다. 적적한 노년에 친목과 화합도 도모하면서 일신의 건강을 즐겁게 건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놀이 삼은 산행으로 몸과 마음의 화평을 다지겠다는 것이다. 즐거운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놀이를 통해 몸의 건강을 돋우기 위해서는 안전 산행이 제일일 터-, 그 안전을 신령님께 정성 다해 비는 것이다.

독축이 끝나고 부회장단의 아헌, 이사들의 종헌이 이어졌다. 일동 재배가 끝나고 회원들이 몇 사람씩 무리를 지어 제상 앞으로 나와 잔 드려 신령님께 축원의 예를 올린다. 예를 올리는 사람마다 돼지 입에 성금 물리기를 잊지 않는다. 돼지의 입은 붉고 푸른 지폐로 넘쳐난다. 한 해의 무사안녕을 비는 정성이다. 체면을 닦기 위한 일일지라도, 그 체면도 또한 정성이 아니랴. 제사 절차가 끝나고 떡을 가르고 술잔을 나누어 음복한다. 그 떡이며 술이 신령님의 음덕인 듯, 그 덕을 고맙게 받는 마음으로 떡을 먹고 술을 마신다.

이제 산행 차례다. 새해의 첫 산행이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조금은 험준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사람도 있고, 달 닦여진 임도를 따라 오르는 사람도 있다. 등산로는 내려오는 길로 잡기로 하고 임도를 따라 걷는다. 굽이굽이 사행(蛇行) 길을 돌고 돌아 오르는데, 몇 굽이 돌아 오르니 등판에 땀이 소록 차오른다. 소나무, 물박달나무, 상수리나무, 느릅나무 들이 맨살로 서있는 가풀막이며 비탈면 군데군데에 짚라인(Zipline)을 설치해 놓았다. 산 아래 위, 혹은 비탈과 비탈 사이에 승강시설물을 설치해 놓고, 그 사이를 연결해 놓은 굵은 와이어에 밧줄로 묶은 몸을 걸어 오르내리는 놀이 시설이다.

. 세상 참 좋아졌네! 요새는 이런 것도 다 있고-. 이곳이 이런 놀이터가 될 줄이야!”

칠십이 넘은 한 회원이 희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감개에 잠긴다.

그 때 이곳에선 석탄이 얼마나 나오던지, 캐면 전부 돈이라, 그 때가 좋았지!”

,사십 년 전 이곳엔 석탄이 무진장으로 나는 광산들이 있던 곳이고, 지금 우리가 오르는 이 길은 석탄 운반로라고 한다. 그 때 돈벌이가 제법 쏠쏠했었다며 다시 한 번 감회에 젖는다.

좋긴 뭐가 좋아! 죽고 다친 사람이 좀 많아?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맞아, 지금도 진폐(塵肺)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좋은 시절이었든, 끔찍한 시절이었든 지금은 모두가 우리를 빠져나간 세월의 그림자들일 뿐이다.

이 길을 이렇게 유람 삼아 다닐 줄 누가 알았겠노?”

지난날을 돌이키며 굽이를 오르고 오르는 사이에 발길은 수정봉 능선을 올라선다. 산 아래를 굽어보니 동쪽에 우뚝 선 오정산이며 북서쪽의 어룡산이 질펀한 마성벌을 옹위하고 있다. 전망대가 얼마 남지 않았단다. 저 멀리로 주흘 영봉이며, 신기, 유곡 벌을 조망하며 잠시 걷노라니,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올라와 새 아침 해를 맞는다는 해맞이전망대가 다가선다. 새해 새 희망을 맞이하던 곳이다. 전망대에 선다. 서쪽으로 백화산이며 대미산도 가물거리며 봉우리를 드러낸다. 세상의 모든 산과 들이 우리의 발아래 있는 것 같다.

, 하늘 한 번 좋다. 햇살도 너무 좋고!”

아침엔 그렇게 추울 것 같더니, 우리 오르니 이렇게 푸르네.”

아따, 오늘이 어떤 날인가! 우리 시산제 날 아닌가!”

마치 하늘이 우리를 위해 맑고 푸르듯, 한껏 감탄에 잠긴다.

내려 갈 때는 등산로를 타보자며, 잘 닦인 임도를 옆구리에 끼듯 하고 좁다란 숲길을 따라 내려온다. 쌓여있는 낙엽에 발목을 잠그기도 하고, 바위를 타넘으며 가풀막을 뛰듯이 내리기도 하며 내리막길을 잡는다. 잠시 상주 쪽 산 아래로 눈길을 돌리니, 널따란 안룡 저수지가 맑은 햇살을 담고, 우리 산행을 축복이라도 하듯, 은빛 윤슬을 한껏 뿜어낸다. 마사 마른 흙이 발길을 미끄러지게 해도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누구의 생각일까. 미끄러지다가 부딪쳐 다치기라도 할세라, 두툼한 매트리스를 곳곳의 나무에 묶어 두었다. 사람은 좋지만 나무는 얼마나 답답할까, 참 친절한 등산로라 하면서도 나무 걱정을 잊지 않는다. 드디어 출발한 지점에 닿았다.

, 새해 첫 등산 한 번 잘했네.”

우리 사는 곳 환히 보면서 산을 오르는 것도 괜찮네!”

저 하늘 좀 봐! 올해 우리 등산 모두 잘할 수 있을 것 같제?“

모두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을 쳐다본다. 올 해 어딜 다녀도 참 즐거운 산행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산제의 하늘을 보며-.(20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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