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제2막 인생 원년의 생일

이청산 2011. 8. 29. 15:02

제2막 인생 원년의 생일
-청우헌 일기·14



매미는 여전히 목청을 돋우고 있지만, 푸른 논들에는 나락이 한창 패고 있다. 어떤 이삭은 고개를 숙이고 황금빛으로 물들 날을 기다리고 있다.

 

외진 시골마을 사람이 되어 산 지도 반 년이 지나가고 있다. 생일을 맞이했다. 2막 인생 원년의 생일이라 할까.

지난날들이 다시 돌아 보인다. 꿈 많은 학창 시절도 있었다. 열정으로 살고 싶었던 청년 시절도 있었다. 열정을 쓸어내리며 골몰로 살던 시절도 있었다. 거센 파도에 몸을 맡기며 해륙을 넘나들던 시절도 있었다. 증오와 분노에 끓던 시절도 있었고, 사랑과 보람에 젖던 시절도 없지 않았다. 그 시절 다 지난 어느 해 겨울 끄트머리에서 그 간 껴안고, 움켜쥐고 살아왔던 삶의 굴레들을 훌쩍 내려놓았다.

그리고 홀연히 강이 있고 산이 있는 골 깊은 어느 마을로 들어왔다. 봄이 가고 여름도 지났다. 생일을 맞은 오늘,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노래를 음미한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그 높은 도의 경지를 어찌 범접이나 할 수 있으랴만, 웬만한 것들은 다 내려놓고 싶어 푸른 산이 내려다보고, 맑은 물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 살고 있음에, 이 노래처럼 마음의 자유 천지를 누리고 싶다.

아비의 생일날이라고 객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왔다. 아들 식구가 오고, 딸 식구가 왔다. 상 위에 케이크를 얹고 촛불을 켜고, 어린것들이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면서 아비의, 할아비의 생일을 기려 주었다. 즐겁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왠지 허전해지는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저 아이들이 이 아비, 할아비가 원년의 생일을 맞으면서 조금은 남다른 감회에 젖는 마음을 알고 있을까.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날의 하나로 여기고 있을 뿐인 것 같다.

,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무얼 기대하고 있는가. 아직도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이 청산 속을 살고 있는 아비를 찾아와 생일을 함께 맞고 있거늘, 무엇이 더 바랄 일이란 말인가. 생애 처음으로 말없이 살라 하고, 티 없이 살라하는 청산을 바라보면서 맞는 생일이 아닌가. 이 생일날 오늘, 진실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기를 애쓸 일이다. 선사(禪師)의 노래는 이어진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 수도 있는데, 미움도 벗어놓을 수 있는데, 벗어놓을 수 없는 게 있다. 사랑이다. 나는 선사의 경지에 이르지를 못했다. 아무리 골 깊은 곳에서 청산과 더불어 산다 한들, 그리운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기를 어찌 벗어놓을 수 있으랴. 어느 경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 미운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라 했던가.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없이 살 수도 있으되,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 사랑하는 사람 없고서 어찌 살아갈 수 있으랴. 미운 사람을 만나면 괴로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 괴로운 것도 또한 사랑 아니랴.

오히려 사랑을 제2막 내 인생의 주제로 삼고 싶다. 사랑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랑 없이 생애의 적적을 어찌 헤쳐 나갈 수 있는가. 사랑 없이 청산이며 청천을 어찌 바라볼 수 있는가. 생애에 대한 사랑 없이 어찌 물같이 바람같이 살 수 있는가. 저 풀을 사랑하고, 저 나무를 사랑하고 싶다. 저 하늘을 사랑하고, 저 별을 사랑하고 싶다. 그리운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2막 인생의 원년 생일을 맞는 오늘, 랄프 W. 트라인의 시를 읽는다.

 

네 영혼의 방에 많은 창을 달아라

우주의 광명이 두루 비치도록

좁은 생각의 문구멍으로는

저 한량없는 빛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눈먼 관념 유희 다 내던지고

하늘처럼 높고 진리처럼 드넓은

그 맑은 창으로 빛이 넘치게 하라.“

 

-나에게서 구하라, 내 안의 무한한 지혜와 생명을 찾아》 ♣(201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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