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작은 잔치판

이청산 2011. 8. 15. 15:27

작은 잔치판
-청우헌 일기·13


이 방송을 듣는 즉시 ㅇㅇㅇ씨네 대문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복을 맞이해서 ㅇㅇㅇ씨 댁에서 떡과 과일을 조금 마련하여…….”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이장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우리 집 대문 앞 광장에서 작은 잔치판이 벌어졌다.

 

대문 앞에는 조그만 광장(?)이 하나 있다. 대문 앞으로 논들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는데, 논들로 들어가는 물길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자리 위에 장방형의 넓적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얹어 놓은 것이 마을 사람들의 놀음 광장이 되었다. 여름밤의 더위도 피하고 심심풀이도 할 겸해서 저녁 무렵이 되면 할머니들이 주로 모여 앉는다. 이 광장에서 마을의 모든 소식이 전해지고,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서로 나누어진다. 때로는 정겨운 노래판이 벌어질 때도 있다.

여름도 한 고비를 넘어 말복 날이 되었다. 이 광장에 복 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어른들이 광장에 모여 앉으면 이웃에서 주전부리 거리를 대접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일부러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언제 동네 어른들을 한 번 모시자고 아내와 생각을 해 오던 터에, 마침 모셔야 할 일이 생기게 되었다.

퇴임을 하고는 공기 맑고 조용한 시골에 조그만 집을 지어 살고 있는 동생네를, 도시에 사는 형님네가 찾아왔다. 형님네는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아늑한 마을 정경에 감탄하며, 동생이 참 좋은 곳에 사는 것 같아 아주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동생이 어느 신문에, 이 동네에 집을 지으면서 대문을 괜히 달았다고 하며 동네의 순후한 인심을 찬미한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 속에 나타난 동네 사람들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서로 정을 나누고 사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일 수가 없더라고 했다. 형님은 떠나면서 적지만 동네 분들 대접 좀 하라며 얼마간의 성금을 주고 갔다. 형님의 정성을 담아 떡과 과일 그리고 약간의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이런 고마운 일이 있나!”

사람들은 아내가 부쳐 내놓은 전을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떡이며 과일을 함께 들기도 하며, 덕담을 건네기도 하고 다른 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형님이 좋으시니 동생이 어찌 좋지 않겠느냐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너무 과한 일컬음을 받는 것 같아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진해진다. 멧돼지란 놈이 콩밭을 다 망쳐놓았다는 둥, 이번 비 때문에 사과가 엄청나게 빠져 버렸다는 둥, 올해는 호박이 적게 열리더라는 둥 일상의 푸념들이 오가다가, 누구네 집엔 옥상에 지붕 얹는 공사를 한다더라, 누구는 어디가 아파 병원에 다녀왔다더라, 누구 집엔 아들네들이 휴가라고 찾아 왔더라,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스스럼없이 나누어진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따뜻한 관심사가 되고, 부침개 하나라도 아주 맛깔스런 요리가 된다. 오늘처럼 함께 둘러앉아 마음을 나눌 때면 그 관심들은 더욱 따뜻해지고, 사소한 먹을거리도 유별한 맛을 내게 된다.

긴 여름 해의 꼬리에도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푸르기만 하던 논들에도 어둠살이 깔려가고 하늘에는 별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르던 마음 사람들의 담소도 어둠에 묻혀간다.

봄까지만 해도 대문 앞 광장은 밤새도록 환했었다. 밤이 좀 이슥해도 언제라도 놀고 싶으면 나와서 놀던 곳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해가 지면 곧장 어둠에 묻힌다. 가로등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논들에 불이 밝으면 한창 자라고 있는 벼들이 이삭을 맺는데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나빠지기 때문에, 모가 시퍼레지고부터는 동네 가로등에 불을 밝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작지만 정담이 꽃피던 잔치판을 마치고 어둠을 저으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길은 어둡지만 마음은 밝다. 오늘 오순도순 함께 앉았던 자리가 좋고, 저 어둠 속에서 토실토실 알곡을 맺어갈 이삭들이 좋다.

별은 집으로 가는 사람들 머리 위로 더욱 반짝이는 빛을 보내고 있었다. (20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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