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앵글을 짜며

이청산 2011. 6. 6. 14:47

앵글을 짜며
-청우헌 일기·11



앵글을 짠다. 선반으로 쓸 수 있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사온 것이지만, 나사를 박아 짜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좌우, 상하 균형이 맞게 얽어서 나사를 끼우고, 튼튼하게 죄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하나를 짜고 나니 온몸에 땀이 밴다.

내 집이라고 마련하여 살기 시작한 이후에 처음으로 가져본 단독주택, 그리고 시골 생활-.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는 다르게 갖추어야 할 것도 많고 갈무리해야 할 것도 많다. 더욱이 마당에 조그만 텃밭을 두고 보니 호미, 낫, 괭이, 삽 같은 농기구며, 여러 가지 그릇 이나 포대 종류며 때에 따라 바꾸어 신어야 하는 신발 등 건사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필요할 때에 쓰고는 아무 데나 그냥 툭툭 던져두니, 다음에 쓸 때는 찾지 못해 불편을 겪기도 하고, 집 안이 매우 어지럽기도 하다. 조용한 한촌 한 자리에 어렵게 집을 지었지만, 집 하나 덩그렇게 있으면 살아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고, 자잘한 것들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도 필요했다. 다용도 공간이나 창고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고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두는 것은 눈에 보이는데 던져두기보다 오히려 불편하다.

그런 것들을 정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앵글을 짜서 선반으로 쓰는 것이었다. 기구상을 찾아가서 앵글과 나사를 구입하여 땀 흘리며 조립을 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생활의 도구들이며 잔재들을 정리해 놓았다. 정리해 놓고 보니 창고 공간도 활용도가 높아지고, 도구들을 찾아 쓰기도 좀 편리해진 것 같다.

생활의 도구들이며 잔재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그것들이 가지런히 정리가 된 것 만큼 마음이 개운한 것 같지는 않다. 무언가 조금은 답답하고 허전한 느낌이 명치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

저런 도구들만큼 내 삶은 잘 정리되고 있는가. 번다한 일들과 관계 속에서 생애의 한 업을 마치고, 후반 생애는 좀 조용한 곳에서 나를 돌아보며 살리라 마음먹고 이 한촌 벽지를 찾아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로 간 목적은 되도록 방해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자는 데 있다고 했다. 법정 스님이 산골 오두막으로 간 것은 간소하고 소박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는 왜 한촌을 살고 있는가? 한촌 행을 결심하면서 생각한 것은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용히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의 명리에 구애 받음 없이, 몸과 마음을 맑게 정리해 가면서 사는 것을 생각했다.

이제 석 달을 갓 넘긴 한촌 생활이라, 꿈꾸던 대로의, 나름대로의 생활의 틀이 잡히기를 바라기는 아직 이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정리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허전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오늘 내가 앵글을 조립하여 정리한 창고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에 잠긴다.

지금 집 앞 모든 논들에는 모내기가 끝나고. 모들이 찰방거리는 물속에서 파랗게 자라나고 있다. 농부들은 봄부터 모판을 만들어 모를 기르기에 애를 썼다. 봄이 익으면서 이른 아침부터 논에 나와 바닥을 써레질하고, 물을 대고, 비료와 거름을 넣고, 모를 심었다. 그 일들은 자연의 질서처럼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농부들의 일하는 손길을 가끔씩 돌아보며 글을 쓴다고 책상에 앉아있다. 농부의 익숙한 손길처럼, 그렇게 글이 써지지 않는다. 무엇을 쓸 것인가, 왜 쓰는가 하는 생각도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농부들이 일하는 논들을 지나 스틱을 짚으며 산을 오른다. 날마다 산에 오르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을 돋우는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지만, 저 농부들이 일로 흘리는 땀과 나의 산행에서 흘리는 땀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초여름 신록이 물에 갓 헹구어낸 빨래처럼 해말갛다. 저 신록 더욱 푸르러지다가 열매를 맺고, 해탈하듯 낙엽을 떨어뜨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생애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오늘도 책상에 앉았다가 집을 나서 논두렁길을 지나 산으로 향한다.

내 삶은 어떻게 정리되어 갈 것인가.♣(20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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