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이청산 2011. 4. 26. 15:17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청우헌 일기·8



새로 태어나는 손녀를 맞이하기 위해 서울의 아들집에 머물고 있었다. 옆집 성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강둑에 꽃이 다 피었어요. 지기 전에 보셔야지!”

며칠 사이에 그렇게 되었는가. 서울을 향하여 출발해 오던 날은 줄지어선 강둑의 벚나무에 겨우 꽃눈이 맺혀 있을까 말까 했었다. 봄이 오려면 이리도 쉬 오나보다.

“내일 모레 토요일쯤은 내려가려고 해요. 그 때까지 지지말고 있으라 그래.”

아들이 쉬는 토요일이 몹시도 기다려졌다. 드디어 토요일, 아들의 차는 마성을 향해 달렸다.

마을 앞 강둑에 이른 것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강둑은 눈부셨다. 천지가 꽃의 세상이었다. 열병식을 하듯 강둑에 줄지어선 벚나무들은 겨우내 간직해 두었던 힘을 다하여 한껏 꽃을 피워낸 것 같았다. 순백의 수많은 꽃잎들이 물결을 만들고 파도를 이루어 출렁이고 있었다. 그 현란에 눈을 바로 뜨기도 어려웠다.

“이를 어쩌나!” 이런 광경을 목도하면 마치 어쩌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어쩌지 못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출렁이는 꽃잎들 따라 가슴이 출렁거렸다.

다리를 건너 집에 당도하니, 꽃 소식을 전해주던 성 선생이 달려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성 선생의 자전거 짐받이에는 술병이 실려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꽃그늘을 달렸다. 꽃잎들은 일제히 입을 맞추어 합창이라도 하듯 나풀거렸다.

“야! 좋다.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성 선생은 꽃잎들이 화사하고 싱그러운 것이 부러운 듯 말했다.

자전거는 마을 정자 앞에 멈추었다. 정자에 앉았다. 눈처럼 날리던 꽃잎들이 강물 위에 떨어졌다. 그 꽃잎들이 품안으로 술잔 속으로 모두 흘러드는 듯했다.

“이태백이 따로 있나. 참 좋다.”

이백의 ‘춘야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중에 “개경연이좌화 비우상이취월(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옥 같은 자리를 펴고 꽃 그늘에 앉아/ 신선 술잔을 돌리며 달빛에 취하다)”라는 구절이 떠올라서 하는 말이다.

“우리 이 마을에 살기를 잘했지?”

성 선생도 나처럼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이 마을을 찾아 살러 왔다. 내가 이 마을이 좋아 제2막의 인생을 의탁하리라 하고 찾아와 보니, 성 선생은 3년 전에 와서 살고 있었다. 같은 은퇴자를 만났다고 무척 반가워했다,

“저길 좀 봐!”

꽃 천지는 강둑만이 아니었다. 탕건봉이 온통 화원이었다. 탕건을 닮았다고 탕건봉이라 부르는 조그만 산이다. 하얗게 피어 있는 벚꽃은 물론이요, 명도와 채도가 조금씩 다른 푸른 잎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있고, 무슨 꽃인지 잎인지 단풍 빛깔의 나무들이 섞여 색색이 조화를 이룬 현란한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이 선생은 좋겠어, 저 걸 정원으로 두고 있으니!”

탕건봉이 내 방 남창 앞에서 바로 보인다고 하는 말이다.

“저런 걸 보고 누가 감탄 안 하겠노!”

“저 뒤에는 어떻고.”

성 선생이 내가 늘 오르는 주지봉을 가리킨다.

“며칠 새에 저럴 수가 있나!”

주지봉 자락도 눈부신 화원을 이루고 있었다. 산벚꽃, 산복숭아꽃, 산살구꽃, 산매실이며 온갖 산꽃들이 흐드러졌다. 마치 눈이라도 내린 듯 온 산이 하얗게 보이다가도, 눈을 좀더 크게 뜨고 보면 붉은빛, 하얀빛, 노란빛. 분홍빛, 푸른빛이 서로 섞이고 어울려 찬연한 빛깔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듯하다.

“저 좋은 걸 보면서 누가 누굴 미워할 수 있겠노?”

“그래서 우리 마실 사람들 얼매나 인정이 많아!”

“암, 그래야지!

산자락의 진달래꽃이 우리가 앉은 정자로 내렸는지 성 선생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면서 얼굴에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다며 웃었다. 술병이 거의 다 비어간다.

“그런데, 봄도 잠깐이야, 저 꽃이 얼마나 갈까.”

“봄만 짧은가, 우리 인생은 어떻고?”

바람결이 이는가 싶더니 벚꽃 잎이 나비처럼 하늘을 날고 있다.

“맞아, 우리 이미 이모작(二毛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즐겁게 살아야지, 인정스럽게!”

석양에 비친 벚나무 꽃잎들이 불그레한 빛을 띠면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손짓하듯 가지들을 흔들고 있었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왔다. 아이들 마음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201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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