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집들이하던 날

이청산 2011. 4. 10. 08:34

집들이하던 날
-청우헌 일기·5



집들이하던 날, 햇살이 맑고 고왔다.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도 없었다.

한촌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 보리라 하고 터를 잡아 집을 짓고, 퇴임 날을 기다려 삶의 터를 옮겨와 새 삶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집은 지었다 하지만, 집에 딸린 여러 가지 시설도 하고, 맨 흙이 드러나 있는 마당도 정리하다 보니 어느 새 한 달이 지나버렸다. 집 일에 매달리느라 퇴임의 적요도 모르고 지냈다.

봄이 비로소 제 볕을 드러내던 3월의 마지막 날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불렀다. 이장이 마을회관에서 방송을 했다.

“ㅇㅇㅇ댁에서 새 집을 짓고 오늘 낮에 집들이를 하고자 하오니 주민 여러분들은 모두 참석하셔서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번 더……”

9시가 조금 넘었을까, 부인네들 네댓 명이 들어섰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벌써들 오시면 어쩌나, 아내가 걱정을 했다. 아니에요, 우리는 일하러 왔어요. 아내가 일을 하고 있는 주방으로 들더니 무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는, 부엌 뒤에 새로 지은 다용도실에 과방부터 차렸다. 어느 부인네는 자기 집으로 가서 부족한 수저며 집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조리가 덜된 것은 함께 조리하면서 접시와 그릇에 음식들을 나누어 담았다.

“수고를 끼쳐서 미안해서 어쩌지요?

“이 동네에서는 큰일 칠 때는 다 이렇게 해요.”

아내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웃의 도움은 이뿐 아니었다.

옆 집 성 선생은 어제부터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다. 성 선생이 시내 정육점에 가서 손수 사온 돼지고기와 뼈를, 자기 집에 설치해 놓은 큰 가마솥에 불을 지펴 삶고 고기 시작했다. 푹 삶긴 뼈를 건져내고 그 국물에 삶은 시래기를 넣고 또 불을 지폈다. 국이 끓여지자 큰 찜통에 국을 퍼내고, 양파, 마늘, 생강, 커피, 물엿, 된장 등을 함께 버무려 넣고 고았다. 어느 정도 고아지자 그 물에 돼지고기를 넣었다. 밤늦게까지 고기를 삶았다. 오늘 아침에는 국에 뼈를 다시 넣고 푹 끓여서 퍼냈다. 그리고 고기를 다시 넣어 재차 삶았다. 그 작업은 상을 차릴 때까지 이어졌다. 성 선생 부인은 온갖 재료를 넣어 잡채를 만들어 집들이 선물로 가져왔다. 성 선생 내외는 우리 집의 집들이를 위해 몸으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이웃 정이 성 선생이 지피던 아궁이의 불처럼 뜨겁게 느껴져 왔다. 같은 연금 생활자라고 마음이 더 뜨겁다.

정오가 되어갈 무렵 마을 회관에서는 방송 소리가 또 울려 나왔다.

“지금 ㅇㅇㅇ댁에서 집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즉시……”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 노인네들이다. 서른 가구 사십여 명이 사는 이 마을에는 기적처럼 초등학생이 셋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십 대도 거의 없고, 오륙십 대 몇 명, 그리고는 모두 칠십 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그래도 맑은 공기와 청정한 산천 탓인지 쇠한 기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 어르신들이 손에손에 크고 작은 선물 하나씩을 다 들었다.

황송하고 민망했다.

“이 좋은 마을에 살게 되어 감사 인사를 드리게 위해 모시려 하는데, 이러시면…….”

“마을을 번듯하게 해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시라고…….” “좋은 일이 벅적벅적 일어나라고…….”

마을 한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것이 보기가 영 좋지 않았는데, 덩그렇게 집이 들어서니 마을도 보기 좋고, 한둘이라도 마을 사람이 더 붓게 되어 참 좋은 일 아니냐고 했다.

마루에도 방에도 사람들로 꽉 찼다. 부엌에서 음식을 차려내는 부인네들의 손이 무척 바빠졌다. 국이며 밥이며 찬들을 담는 사람 나르는 사람으로 나누어 일손에 빈틈이 전혀 없다. 순후하고 정겨운 인심 때문일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분이 있는 집을 위해서는 밥과 찬을 차려 갖다 드리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처음일세. 큰 축복이요, 큰 경삽니다.”

외지에 출타중인 한 집을 빼고는 다 왔다고 한다. 절의 스님도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현판으로 걸린 ‘청우헌(靑遇軒)’이 늘 푸르게 살자 하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라는 걸 알고는 참 좋은 생각이라며 거듭 축하해 주었다. 집을 지은 건축회사 사장님은 커다란 화분을 건네며 축하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실 수 있도록 박수 크게 한 번 칩시다.”

어느 분이 외치자, 마루며 방에 있던 모든 분들이 손뼉을 크게 울렸다.

“고맙습니다. 더욱 정답게 살도록 애쓰겠습니다.”

오후가 되면서 날은 더욱 포근해지고, 자리는 덕담으로 인정으로 무르익어 갔다.

뜻밖의 손님들이 왔다. 몇 년 전 이 지역 중학교에 근무할 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당시의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운영위원들, 학부모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온 것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수도 있는 인연인데, 그 인연 곱게 간직해 두었다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여간 고맙지 않다.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 찾아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그 때 정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더욱 건강하십시오.”

자리는 오후 내도록, 밤이 이슥할 때까지 이어졌다. 술잔이 도는 소리와 함께 웃음이며 덕담 소리가 끊어질 줄 몰랐다. 이제 마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마을은 풍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심이 더욱 아름답다. 그 인심을 함께 나누며 살아갈 삶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웃음소리를 따라 더욱 부풀어져 갔다. ♣(20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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