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주지봉의 봄을 다시

이청산 2011. 4. 11. 08:07

주지봉의 봄을 다시
-청우헌 일기·6



오늘도 주지봉을 오른다. 좀처럼 봄이 올 줄 모르던 산에 조금씩 봄기운이 돋아나고 있다. 생강나무가 봄의 전령사인 양 노란 꽃눈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좁쌀 같은 노란 입자들이 모여 콩알만한 꽃들을 피워낸다. 날이 지날수록 꽃이 조금씩 커지면서 여물어진다. 바위틈에 보랏빛 조그만

제비꽃도 보인다. 비로소 진달래꽃 망울도 보이는가 싶더니 한두 잎 붉은 꽃잎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제야 볕 바른 봄이 오려는가.

주지봉의 봄을 다시 맞는 감회가 새롭다. 수 년 전 이 지방의 어느 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주지봉과 인연을 맺었다. 운동 삼아 날마다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을 찾아다녔다. 산은 많지만 그런 산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아늑한 동네 뒤로 나지막이 솟아있는 산봉우리를 발견했다. 해발 367m의 주지봉이었다.

오르기는 조금 가팔랐지만, 적당하게 땀이 나게 해주는 것이 좋았다. 생강나무 노란 꽃이 좋았다. 도토리를 톡톡 떨어뜨리는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도 좋았다.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안고 서있는 고사목들도 마음을 끌었다. 정상에 오르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자락 군데군데 오순도순 평화롭게 자리를 틀고 있는 동네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주흘산, 백화산, 어룡산, 오정산, 사위를 둘러친 명산의 자태를 그윽이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날마다 올랐다. 비가 내려도 눈이 와도 올랐다. 생강나무 노란 꽃이 지고 푸른 잎이 났다. 단풍이 지고 도토리가 떨어졌다. 소나무 가지에 눈이 얹히고 나무들이 숨을 죽였다. 붉은 지초가 사는 곳이라 주지봉이라 했던가. 삼백 번을 오르던 날, 마성 사람들이 주지봉 표지석을 세우고, 뒷면에 내가 삼백 번을 올랐노라고 새겨 주었다. 날마다 해거름이면 타고 달려온 자전거를 마을 숲에 세우고 내쳐 주지봉을 오르는 일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주지봉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주지봉과도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잊을 수는 없었다. 문경이 좋고 마성이 그리웠던 것은 주지봉 때문이었던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 살면서도 간혹 마성을 찾았다. 마성에 올 때면 주지봉을 꼭 올랐다. 등판을 기분 좋게 적셔주던 오름길도 좋았지만, 꼭대기에 올라서 보는 마성의 평화도 그리웠다.

세월이 흘러갔다. 퇴임의 날이 다가왔다. 제2막의 인생을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번거로운 도회보다는 강이 있고 산이 있는 한촌에서 살고 싶었다. 마성을 생각해냈다. 마성으로 달려와 살 만한 땅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날,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땅이 있었다. 주지봉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못고개 마을.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서는 주지봉이 마을을 싸안고 있다. 무슨 숙명과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주지봉 아래에 어찌 이런 땅이 있었던가.

그 땅을 껴안았다. 집을 짓기 시작했다. 가을이 들면서 짓기 시작한 것이 겨울 들머리에 끝났다. 옥상에 방을 하나 올렸다. 강과 산을 더욱 가까이하기 위해서였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퇴임을 했다. 주지봉이 있는 못고개 마을로 삶의 터를 옮겨왔다. 떠난 지 4년 만에 다시 온 것이다. 그리고 주지봉의 봄을 다시 맞는다.

볕 바른 봄을 맞이하기가 힘들 듯, 주지봉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쉽지 않았다.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어야 할 일이었다. 해내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주지봉의 봄은 따사로운 인정으로부터 왔다. 엊그제 비로소 집들이를 했다. 집을 다 지었다지만 더 손을 보아야할 곳이 많았다. 집들이를 하던 날, 마을 사람들은 마치 그네들 일이기도 한 양 일손을 모아 주고, 복을 빌어 주었다. 하루 종일 축복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꽃이 되어 피어났다. 주지봉의 아름다운 봄꽃이 되어 만발하게 피고 있었다.

더욱 만발하게 피워 가야할 주지봉의 꽃이었다. 주지봉의 평화였다.♣(20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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