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책을 버리다

이청산 2011. 1. 14. 11:07

책을 버리다



궁벽한 한촌에 조그만 집을 지었다. 은퇴 후의 삶을 의탁할 곳이다.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도회지 어느 곳에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오던 집이 있지만, 제2막의 인생은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마당에 텃밭이 있는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두 늙은이만 살 곳이기로 집은 크지 않아도 될 것이고, 크면 오히려 짐스러울 것 같았다. 보자기 하나 펼쳐 놓은 것 보다 조금 더 너를 만큼 조그맣게 지었다. 방 두어 개에 거실 겸 부엌 한 칸, 그리고 옥상에 조그만 서재 하나, 아이들이 더러 어미 아비를 찾아 온다해도 두 식구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남쪽으로 난 창을 열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사방으로 둘러친 산을 병풍 삼고 강이며 들을 자리 삼아 살아가리라 생각하니 청춘의 소년처럼 가슴부터 설렌다. 흙빛 벽돌에 초록 지붕의 조그만 집이 멀리서 보면 아담하고 예뻐 보인다.

이제 달포쯤 뒤면 은퇴 절차를 마치고 도회 생활을 정리하여 그 작고 아담한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제1막의 인생을 정리하고, 꿈과 희망과 사랑을 안고 제2막의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이고 쌓인 수십 년 묵은 살림살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주방에도 가득, 안방에도 가득, 거실에도 가득 차 있는 그 살림살이를 그대로는 그 '작고 아담한 집'에 다 들일 수가 없다. 온 벽을 둘러가며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은 다 어찌할 것인가. 새 집 이층에 조그만 서재 하나 마련해 놓았다 한들, 그 책을 다 옮기기란 단연코 불가능하다. 어찌하랴!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얻을 수밖에 없는 결론은 버리는 것이다.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세간을 버리는 일은 일단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책을 버리는 일이며, 무슨 책부터 버릴지는 내가 결정할 수밖에 없다. 책을 갈무리하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버리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바라보니 선뜻 버릴 수 있겠다 싶은 게 없다.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산 것하며, 직장인이 되어 첫 봉급으로 산 것하며, 전공 서적하며, 아껴 보던 문학 서적하며 어느 것 하나 애정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하나도 버리고 싶은 것이 없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 것이 들어설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을 위안과 격려로 삼아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비장한(?) 각오로 버리기를 마음먹는다.

우선 극히 고전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한 연도가 오래된 것부터 버리기로 한다.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모두 세로로 쓰여진, 활자도 극히 작은 고본들이다. 읽은 책도 있고 안 읽은 책도 있지만, 내가 간직하지 않아도 세상에 많이 널려 있을 책들이다.

여러 가지 개인 저작물들이며 문학지, 동인지, 정기간행물들도 미련 없이 버린다. 정성 들여 보내준 분들에게는 참 미안하지만, 고마운 마음만은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고, 인생 제1막을 마감해야 하는 나의 생애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십 년 가까운 교직생활을 통해 모이고 쌓인 교과서며, 학습과 지도에 필요했던 자료들을 빼내었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이것들도 일단 퇴장을 시켜야겠다. 내가 있어 이들이 있는 것이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엔 여지없이 사라질 것들이 아닌가.

아, 그런데 그 중에는 인쇄된 책 말고 내가 쓴 학습지도안이며 학급경영록 같은 것들도 있구나. 나름대로는 열성을 다하여 작성하고, 그걸 바탕으로 가르치기를 애썼던 삶의 편린들, 어느 아이의 성적은 어떻고 행적은 어떻고 하며 콜콜히 적은 삶의 기록들-. 차마 버릴 수가 없다. 창고 어디 한 구석에라도 묶어 두었다가 내가 이승의 삶을 끝내는 날, 그들의 생애도 끝나게 하고 싶다.

이래저래 고르고 가려 묶어내고 나니 책장의 반쯤이 휑하니 비었다. 비어버린 책장을 바라보니 시원스럽기도 하지만, 아끼고 사랑하던 자식들을 모두 객지로 떠나보낸 노부모의 마음같이 아쉬움과 허전함이 겨울 벌판을 스치는 바람처럼 스산하게 스며든다.

다시 법정스님의 말씀에서 위안을 얻는다.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스님의 말씀처럼, 버리고 난 뒤의 이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 새로운 삶을 여는 통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장에서 빼낸 책들을 묶음묶음 지어서 문 밖에 내 놓았더니 어느 결엔가 누가 다 가져가 버렸다. 필경 소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져갔을 것이다. 다행이다. 그냥 태워지지 않고, 묻히어 썩지 않고 어떤 용처든 찾아갔다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새 삶의 통로가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다.

법정스님의 말씀을 다시 고이 새긴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스치고 지나가야 합니다." ♣(20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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