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주지봉에서 새 해를 맞다

이청산 2011. 1. 10. 11:28

주지봉에서 새 해를 맞다



주지봉에서 새 해를 맞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 마성에 살면서 처음으로 해맞이 행사가 열릴 때 주민들과 더불어 새 날 새벽에 주지봉을 올라 새 해를 맞은 적이 있다. 그 때 주지봉에서 새 해를 맞은 것이 인연이 되어 올 새 해를 주지봉에서 맞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는 발령지를 마성으로 얻어 삶의 터를 삼고 살 때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궁벽한 한촌이었지만 풍경은 청정하고 인심은 순박했다. 두 해를 살다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옮겨가야 했다.

 삶의 터를 옮겨 다니는 사이에 퇴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퇴임 후를 어떻게 어디에서 살 것인가. 아내와 함께 몇 달을 두고 고민하고 의논했다. 숱한 논의와 발품 끝에 얻은 결론으로 '어떻게'는 조용한 시골에서 조그맣게라도 텃밭을 가꾸며 사는 것이었고, '어디서'는 마성에서 사는 것이었다. 마성은 우리가 찾는 '조용한 시골'로 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마성의 곳곳을 다니며 살 만한 곳을 찾았다. 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땅이 있었다. 마성을 살 때 늘 올라 다니던 주지봉, 그 아래 못고개마을에 조그만 땅이 임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땅이 이상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르면 마성의 정다운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주지봉 아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껴안을 수 있었다. 이 마을은 농촌진흥청이 선정한 전국 100대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 중의 하나에 들기도 한 곳이다.

퇴임을 몇 달 앞둔 가을 어느 날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해 바뀐 2월에 퇴임해야 옮겨 살 수 있지만, 추워지면 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가으내 짓기로 했다. 가을 한 철을 꼬박 지나고 초겨울이 들어서야 완연한 형체를 갖춘 집을 만날 수 있었다. 집은 아담하고 예뻤다.

바닥 면적이 스무 평이 채 되지 않은 조그만 공간이었지만, 좀 큰 방 하나, 작은 방 둘과 거실을 갖추고 옥상에 방 하나를 더 얹었다. 가끔 찾아올 아이들과 함께 할 생활공간과 사유의 샘을 길어 올릴 정서 공간을 갖추려 했다. 남쪽으로 창을 많이 냈다. 따뜻한 햇살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다.

집을 다 짓고, 해가 바뀌기 이틀 전에 준공 절차도 마쳤다. 새 해를 새 집에서 맞으며 새 출발의 뜻을 새기고 싶었다. 집이 다 지어지고도 집 안에서 아직 몸을 눕혀 보지 않았다. 누가 말하기를, 첫날밤은 좀 시끌벅적하게 보내어 지신을 눌러 주는 게 좋을 것이라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친구 부부 몇 쌍을 청했다. 친구들이 찾아오기 전날 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친구들은 미끄러운 눈길을 무릅쓰고 흔쾌히 찾아왔다. 서설이 내린 것이라 했다. 사진작가 친구는 자기 작품을 가지고 오고, 다른 사람들은 살림이 번성하라는 뜻을 담은 선물들을 들고 왔다. 살림을 옮겨오지 않아 집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처지지만, 불편해 하지 않았다.

덕담을 나누고 축배를 들며, 때로는 집이 들썩이게 흥타령도 울렸다. 왁자지껄한 윷판이 벌어져 흥을 더하기도 했다. 밤이 이슥해지면서 이 방 저 방 할 것 없이 자리는 낭자해지고 신명은 더욱 자지러져 갔다. 지신이 모두 주눅이 들 것 같았다. 악신은 무릎을 꿇고, 선신은 새 집 새 역사의 시작을 축복해 줄 것 같았다.

섣달 그믐날 밤을 아내와 둘이서 새웠다. 따뜻하고 안락한 밤이 지나고 새 날의 새벽을 맞이했다. 새 해 새 날의 첫 새벽, 미명을 뚫고 주지봉으로 향했다. 엊그제 내려 산등성이를 상기도 덮고 있는 눈이 길을 밝혀 주었다. 순백의 눈길을 타고 산을 오른다. 오를수록 어둠은 엷어지고 새 날의 새 기운이 트여 온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등판이 흥건하게 젖었다. 선착객 한 사람이 서 있다. 새해 좋은 일 많으시라며 덕담을 나누고 함께 새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건너편 오정산 봉우리가 시나브로 밝아오기 시작했다.

회색이던 동녘 하늘빛이 노랑, 진노랑으로 변해 가면서, 구름 한 자락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맑고 고운 빛 속으로 갓난아기 얼굴 같은 것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점점 둥글어지면서 찬연한 빛을 뿌리기 시작한다.

손을 모으며 눈밭 위에 엎드렸다.

"천지신명이시여! 지난해에는 저에게 안락한 보금자리를 지을 수 있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그 새 집을 주신 덕분에 새해 새 날 이 언덕에서 새 해를 고마움으로 맞습니다.……"

"……이제 저는 인생 제1막을 끝내고, 이 산 아래 마을에서 제2막의 삶을 지어 나가려 합니다. 새 날 새 해의 이 밝은 기운처럼 늘 밝은 빛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소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빌고, 복덩이 손자 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모았다.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착하고 아름답게 살게 해주시고, 사랑하며 살고 싶은 이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주소서. 주리며 사는 사람들은 주리지 않게 해주시고, 평화로 살고자 하는 이에게는 안락한 평화를 누리게 해 주소서.

해는 산봉우리를 솟아올라 세상으로 성큼 내려서고 있다. 맑고 밝은 햇살이 큰 보자기를 펼쳐 세상을 감싸듯 산등성이로 마을로 번져갔다. 저 빛 속에 모든 소망이 다 담겨 있을 것 같다. 저 새 해의 맑고 고운 빛, 저 빛 한 자락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저 빛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면-. 가슴을 활짝 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속으로 희망도, 사랑도, 평화도 다 들어왔다. 손자란 놈도 쑥 들어왔다.

해가 더욱 높이 솟았다. 새 삶을 가꾸어갈 마성의 풍경이 정겹게 안겨왔다.

희망과 사랑과 평화를, 손자놈까지 부풀게 안고 주지봉 내리막길을 걷는다.

주지봉에서 맞는 새 날, 새 해, 새 아침-.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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