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집이 다 지어지다

이청산 2010. 12. 21. 09:52

집이 다 지어지다



거실이며 방마다 도배를 하고 전기 시설을 마치면서 집이 다 지어졌다.

벽에는 흰색 벽지를 바르고, 방바닥에는 연노랑 장판을 깔고, 거실에는 무늬목으로 마루를 놓았다. 도배공이 도배를 끝내자 전기공이 실내외에 전등을 달고 콘센트를 설치하여 불을 밝혔다. 보일러가 돌기 시작하고 방에 온기가 피어올랐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조그만 집을 지어 퇴임 후를 보내고자 하는 내 필생의 소원이 공사를 시작한 지 석 달여 만에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하다. 새 삶을 안락하게 보듬어 줄 공간이라 생각하니 귀하게 보이지 않는 부분이 없다.

이층에 방 하나를 얹어 나무 계단을 놓아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일층에는 거실과 조금 큰 방 하나에 작은 방 둘을 넣었다. 아이들이 찾아 올 때를 생각해서다. 주방을 겸한 거실 한 쪽에 싱크대를 두고 그 앞에 아일랜드 식탁을 설치하여 다목적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일층은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공간이라 한다면, 이층은 서재로 쓰일 정서 공간이다.

내년 봄이 오면 나는 제도에 얽매일 일이 없는 자연인이 되고 자유인이 된다. 이십여 평이 될까 말까한 조그맣고 조촐한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자연과 자유를 만끽하는 제2막 인생의 꿈을 오롯하게 담아 갈 것이다.

아내와 함께 밥도 짓고, 청소도 하고, 마당 텃밭에는 채소도 가꿀 것이다. 찾아오는 이웃들을 반겨 맞아 마당에 자리를 펴거나, 거실에 앉아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것이다. 이층의 방에 앉아서 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강을 보고, 들판과 이웃의 삶을 만날 것이다. 그 풍경, 그 정을 담아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느낌과 생각의 샘을 길어 올릴 것이다.

집을 꾸미는 일들을 하는 사이에 방에 거실에 계단에 내려앉은 먼지며 여러 가지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고 쓸고 닦는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는 마음으로 구석구석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여 닦아내고 쓸어낸다.

쓸고 닦는 사이에 날이 저문다. 전등을 밝힌다. 새로 단 전등들이 눈부신 빛을 낸다. 마당으로 나와 본다. 창에서 번져 나오는 불빛이 밤바다를 비추는 등댓불처럼 밝게 비친다. 이 집에서, 이 보금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벼이삭이 고개를 숙여 갈 무렵부터 짓기 시작하여 날리는 눈발이 들판의 검은흙을 하얗게 덮을 무렵에 다 지어졌다. 계절이 바뀌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집은 형태를 갖추어갔다. 지어지는 과정을 살피기 위해 동네를 드나드는 사이에 동네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웃들이 동네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일하는 사람들 주라고 참을 가지고 오는 사람, 끼니때가 되면 서로 자기 집으로 가자며 소매를 끄는 이웃들이 나를 동네 사람이 되게 했다. 해가 저물어 일이 끝나고, 짓고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언제나 거나했다.

술 빚는 솜씨가 좋은 옆집이 나를 부르고, 인심이 유별난 뒷집이 나를 끌어 주안상을 차렸다. 안주는 앞 동네 이 씨가 언젠가 잡은 멧돼지의 고기로 끓인 찌개다. 정에 취하고 술에 불콰한 밤이 이슥해져 갔다. 이 신세를 언제 다 갚을 수 있겠느냐 하면, 이웃들은 "신세는 무슨! 정답게 살면 되지요."라고 한다. '정답게'라는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나누었던 이야기들-. 누구네는 가을에 사과를 얼마나 따고, 감을 얼마나 깎았다는 둥, 누구는 어제 강에 가서 고기를 잡고 다슬기를 주웠다는 둥, 누구네는 서울서 아이들이 왔다는데 손자가 많이 컸다는 둥, 누구는 지금 염소 우리를 짓고 있다는 둥, 손바닥을 드려다 보는 듯 이웃의 일들에 환하다. 사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이웃이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었다. '정답게' 사는 것이다. 살아온 날을 돌아본다. 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제도 속을 살고 도회 생활에 젖는 사이에 누구에게 도타운 정을 주고, 누구와 그리 정다워 본 적이 있었는가. 제 집 드나들 듯 서로 드나들며 정을 돋우고, 제 일인 듯 서로 품을 나누며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서 새로운 삶의 길을 본다.

이 새 집으로 삶의 터를 옮겨오는 날, 제2막의 인생을 시작하는 날, 새 방에 이웃들을 제일 먼저 앉힐 것이다. 박주로나마 정 담은 술잔을 나눌 것이다. 서로 안고 살자 할 것이다. 내가 다가가 안을 것이다.

다 지어진 새 집을 바라보며, 그 위에 뜬 맑은 하늘을 보며 생각한다. 정다운 삶을-.

사랑으로 사는 삶을-.♣(2010.12.19)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지봉에서 새 해를 맞다  (0) 2011.01.10
이별 여행  (0) 2010.12.28
낙엽 진 산길을 걸으며  (0) 2010.11.23
담을 쌓으며  (0) 2010.11.11
사랑의 여백  (0) 201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