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바람이 맛있어요

이청산 2011. 1. 25. 11:52

바람이 맛있어요



어느 날 승윤이가 제 아비 어미랑 할아비 할미를 찾아 찬바람 부는 한촌에 왔다. 집을 새로 짓고 처음이다. 새 집이 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며 아비 어미와 함께 넓죽 엎드려 절을 한다.

지난여름에 만났을 때보다 더 많이 영리해진 것 같다. 제 이름도 쓸 줄 안다고 하고, 말에도 제법 꾀가 흐른다. 집이 참 예쁘다고 했다. 2층으로 나있는 나무 계단이 신기한 듯 몇 번이나 오르내린다.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다고 했다.

2층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참 좋다고 했다. 파란 하늘 아래 눈이 희끗하게 덮인 산이 있고. 산 아래에는 오막조막 집들이 모여 있고, 길게 뻗은 고속도로에 장난감 같은 차가 달리고, 강이 흐르고 들판이 보이는 풍경 들이 제 눈엔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승윤이는 높은 아파트에서 산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높다란 아파트들 아니면, 크고 작은 빌딩들, 거리에 나서면 휘황한 간판의 물결이며 번잡하게 오가는 차들, 저가 사는 곳에 비하면 한적한 시골 풍경이 이채롭게 보이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가 보자고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나가고 싶다고 했다. 밖으로 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난 길을 걸었다.  엊그제 내린 눈이 아직도 논들 곳곳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게 뭐예요."

"저건,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야."

"벼요?

벼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었다. 눈 위를 걷고 싶다고 했다. 논으로 들어갔다. 검은 흙 위에 덮여 있는 하얀 눈을 밟으며 함께 걷는다.

"서울에도 눈이 많이 왔잖아."

"서울 눈은요, 미끄러워서 걸을 수가 없어요."

뽀독뽀독 소리가 나는 것이 재미있는 듯, 승윤이는 눈이 있는 곳만 골라서 밟았다.

문득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춥지?"

묻는 말에는 대꾸를 않고 코를 킁킁거린다.

"할아버지, 바람 한번 먹어 봐요."

"……!"

"바람이 참 맛있어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뭐라고!"

"바람이 참 맛있다구요."

바람이 맛있다고! 일찍이 누가 바람의 맛을 보았는가. 어느 시인이 바람의 맛을 읊었던가. 바람결을 맛으로 느낀, 기막힌 그 느낌이 너무나 놀라웠다. 역시 때묻지 않는 어린아이의 느낌이고 생각이었다. 승윤이의 그 말이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어린것의 '기막힌 말'을 모티브로 글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필을 씁네 하고 있는 할아비가 손녀 아이의 그 기막힌 말을 듣고도 글을 하나 쓰지 못하면 어디 될 일인가.

무어라 써야 할까, 그 어린것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몇 날을 두고 궁리하고 고민해도 마뜩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보다 못한 감각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자괴감마저 느껴졌다.

어느 시인에게 승윤이의 '기막힌 말'을 이야기하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정말 귀엽네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시인도 승윤이의 말을 두고 사뭇 감탄했다. 며칠 뒤 그 시인은 시 한 편을 들려주었다.

 

차가운 겨울 한낮

할아버지 손을 잡고 논길을 걸었어요.

 

정다운 냄새들이 빨갛게 된 코끝으로 몰려와

금세 친구가 된 듯 바람이 어깨동무했지요.

 

할아버지 바람 좀 먹어보세요.

바람이 너무 맛있어요.

 

서울에선 이런 바람

맛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해요.

 

할아버진 참 좋겠어요.

매일매일 논길 걸으며 바람과 만나잖아요.

 

할아버지와 사는 시골의 바람을

주머니에 불룩불룩 담아서

 

내 친구들에게 한 줌씩 나누어주면

친구들은 알까요? 바람의 맛을.

 

                            -구은주, '바람이 맛있어요'

 

역시 승윤이의 말은 시였다. 시로 표현하니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을, 산문으로 풀어내려 한 것이 답답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상상력을 곁들여 승윤이의 마음과 생각을 아주 잘 드러낸 것 같았다.

워즈워스의 말처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일까. 세속의 더께가 끼어 있는 어른의 눈과 마음으로서는 행할 수도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여섯 살 승윤이는 먹어보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했다. 바람이 참 맛있다고 한 그 어린것의 맑고 깨끗한 마음은 어른의 마음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 같다. 그 순수 앞에서는 어른이 오히려 부끄럽다.

어른도 바람의 맛을 느끼며 살 수는 없을까.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마냥 뛰는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없을까. 어린것의 그 마음처럼 살고 싶다.

궁벽한 한촌에 조그만 집을 지어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승윤이의 신선하고 순진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곳에서-.♣(20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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