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이별 여행

이청산 2010. 12. 28. 11:02

이별 여행



햇살이 퍼져 있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방학식을 마치는 대로 길을 달려 보경사가 있는 내연산에 들러 산길을 걷다가 강구로 가기로 했다. 지나온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뜻 깊게 맞이하기 위한 여행이다. 선생님들에게는 내년을 기약하는 여행이지만, 나에게는 이별 여행이나 다름없다. 생애의 마지막 방학이요,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별 여행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방학을 알차게 보내라는 당부와 함께 방학식 절차를 모두 끝내고,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탔다. 고속도로를 달려나갔다. 차창으로 한겨울 맑은 햇살이 스며들고, 나신을 드러낸 산과 들판이 스쳐갔다. 두어 시간을 달렸을까.

발을 내린 곳은 내연산 들머리에 있는 보경사였다.  602년 신라 진평왕이 지명법사와 함께  불당을 지어 세운 절로 일천사백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일주문 앞에서 함께 한 나들이를 기리는 기념 촬영을 하고 절 경내로 간다.

세월의 더께와 함께 창연한 빛을 간직한 탑을 돌아 대웅전에 든다. 천고의 세월 속에서 수많은 비원을 간직하고 계실 부처님을 향해 손을 모은다.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을 주시고, 평화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평화로 살 수 있는 원력을 주옵소서.

기암괴석이 이루는 절경과 더불어 열두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는 내연산 계곡을 오른다. 누가 '내연(?)의 연인과 함께 오르면 어울릴 산.'이라 하고는 함께 웃는다. 그럴 것도 같다. 갖가지 모양을 한 바위와 석벽이며 갖은 자태로 뻗고 휘어진 나무들이 어울려 깊은 계곡을 배경 삼아 은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품이 내연이라도 맺고 싶을 만큼 보는 이의 눈을 살갑게 자극한다.

나무며 바위들은 모두 맨살이다. 찬란한 녹엽으로, 붉게 타는 불빛으로 생애를 장식하다가, 이제 세속의 옷을 모두 벗고 맨살로 서서 지나온 세월을 상기도 하면서 다시 올 생명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세월을 부지런히 살아 피어난 저 진솔한 맨살의 아름다움-.

나도 지금 녹엽도 떨치고 붉게 타던 빛도 벗어버리고, 이제 맨몸으로 서서 제2막으로 펼쳐질 새 삶을 기다리고 있다. 맨살의 내연산 저 아름다움처럼 나의 나신도 아름답게 서 있는가. 얼굴에 홍조가 인다. 내 맨몸은 저렇게 아름다울 것 같지는 않다. 저 나무들의 부지런했던 생명 작용에 비하면 내 생애란 나타 속에서 살아온 것만 같다.

폭포 하나가 나타난다. 한 겨울 맵싸한 바람도 아랑곳 않고 순백의 물줄기를 쉴새없이 쏟아낸다. 우렁찬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맑고도 푸른 명경을 이루어 청랑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의 모든 분주함이 엉겨

그대 품에 들어와도

마다 않고 빛이 될 당신의 가슴은

토해내고 토해내도 여전히 우렁찬

열두 가락 폭포인지요.(구은주, '산')

 

저 떨어지는 폭포처럼 우렁차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 세상의 분주함을 향하여 빛이 되어 본 적이 있는가. 언제 나의 삶은 '토해내고 토해내도 여전히 우렁찬 열두 가락 폭포'로 살 수 있을까.

내연산 열두 폭포 중에 겨우 한 자락 폭포를 보고 있노라니 내 제1막 생애처럼 해가 기울고 있다. 더 저물기 전에 다음 목적지로 가야한다. 산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산을 나서려 할 무렵 어느 작고 수필가의 기념비가 보인다. '한흑구 문학비'다. 비문에는 그의 대표 수필 '보리'의 한 대목이 적혀 있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삶도 있을까. 저물지 않는 삶이 있을까.

보경사 경내를 벗어나 일행과 함께 차에 오른다.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어둠을 밀어내듯 길을 돋우어 나간다. 바다는 밤도 아랑곳없이 철썩이는 파도로 생동하고 있다. 강구항의 어느 집 앞에 이른다. 회와 게가 유별 맛있는 집이라 한다.

쉰다섯 명의 가족들과 한 자리에 앉는다. 벽에는 새해의 할 일을 생각하고 명품교육 실현을 꿈꾸기 위한 워크숍임을 알리는 길다란 플래카드를 붙인다. 날더러 인사를 하라고 한다.

"……우리는 올 한 해 유명 대학에도 아이들을 합격시키고, 생활지도 최우수교 표창도 받아 학교교육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교과교육과 인성교육을 통해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은 박수로 화답한다.

"이제 우리는 '자율형 공립고'라는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새 역사를 우리가 창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워크숍의 주제는 '창의'로 정했습니다.……"

어느 한 부분이 시려오는 듯하다. 나는 볼 수도, 겪을 수도 없는 장면을 내가 그려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입을 타고 나오는 어휘들이 허공을 맴도는 것 같다. 그래도 경청을 마다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역사 초유의 '자율형 공립고' 초석을 다지자는 건배를 외쳤다. 모두 잔을 높이 들었다.

선생님들은 나에게 잔을 권해왔다. '드리고 싶다'며 주는 잔일 뿐, 누구도 퇴장해야 할 사람에게 권하는 석별의 잔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 혼자만 제1막의 삶을 마감해 가는 자리라 생각할 뿐이다. 선생님들인들 어찌 모르랴. 나를 배려해 주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따뜻한 메아리가 되어 안겨 온다. 화합의 열기와 함께 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성악가인 음악선생님은 오늘의 자리를 축복하는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만남도 떠남도 모두가 축복인 것만 같은 시간들이 따뜻하게 흘러갔다. 뜨거워져 가던 자리를 이슥해져 가는 밤 속에 묻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새해를 기약하자며 일어섰다. 오늘의 나들이에 마침표를 찍는 박수를 쳤다.

어둠을 뚫으며 귀로에 선다. 결의를 새기고 화합을 다진 시간들을 품고 생활의 장으로 돌아간다. 즐겁고 따뜻한 이별 여행에서 가벼운 걸음으로 나 돌아간다. 이별을 맞이하러-.

차창 밖을 보니 마른 풀 몇 잎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가 마른 잎을 스치던 불빛처럼 문득 뇌리를 스쳐간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2010. 12. 23. 마지막 겨울방학을 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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