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낙엽 진 산길을 걸으며

이청산 2010. 11. 23. 16:07

낙엽 진 산길을 걸으며
 -물러날 날 백 일을 앞두고



 오늘도 퇴근을 하고 해질 녘의 산길을 걷는다. 등판에 땀을 적시며 가풀막 길을 올라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정자 앞에 서면, 해는 바야흐로 건너편의 서산을 넘어가면서 손수건 같은 마지막 노을 빛을 능선에 걸어놓고 있다.

이 산을 오를 수 있는 날이 몇 날이나 남았는가. 손꼽아 헤아려 보니 아, 꼭 백 일이 남았구나. 물러나야 할 날이 백 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백 일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가슴이 저 노을 빛 같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지난 여름, 어느 시 낭송회에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외웠던 신경림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가 다시 떠오른다.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땅거미가 짙어지는 산길을 내려간다. 빛깔 곱던 단풍잎들이 이제는 낙엽이 되어 길 위에 내려앉아 발목을 잠기게 하고 있다. 사각사각 사그락사그락……, 밟는 소리가 정든 이와의 속삭임처럼 정겹다. 사랑하는 이에게 애무를 받는 듯한 느낌이 발목을 타고 오른다.

지난 봄, 수줍게 애잎을 피워낸 나뭇가지는 여름을 맞아 작열하는 햇빛을 받아들이고, 왕성한 힘으로 물을 끌어올려 진초록의 무성한 잎을 피워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듯 온 산을 초록의 물결로 덮기도 했다.

가을이 왔다. 초록이 무성했던 잎새는 색깔을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노랗고 붉은 색깔로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면서 여러 가지 빛깔을 연출해 낸다. 마치 저물어 가는 생애를 멋지게 장식하려는 듯.

잎이 곱게 물들 무렵 나뭇가지에는 또 하나의 세포가 층을 이룬다. 잎자루와 가지가 만나는 곳에 생겨나는 떨켜라는 것이다. 뿌리에서 줄기를 타고 올라온 물기가 잎으로 가지 않게 하는 세포라고 한다.

나무가 겨울을 무사히 나고, 다시 봄이 오면 새로운 잎새를 피워낼 수 있도록 물기를 비축하기 위해서 잎으로 가는 물길을 막는 것이라 한다. 물기를 공급받지 못한 잎새는 말라 가면서 고운 빛이 들다가 떨어져 낙엽이 되는 것이다.

떨켜가 잎으로 가는 물길을 막는 것은 잎을 시샘해서가 아니라, 질 것이 져야 날 것이 나는 순리를 따르는 것일 뿐이다. 낙엽이 지는 것은 잎새를 흔드는 바람 때문만도 아니고, 아래로 내려앉아야 하는 중력의 법칙 때문만도 아니다.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떨어질 뿐이다.

나도 한때 여름의 초록과 같은 시절이 있었던가. 지금 나와 나의 일 사이에도 떨켜가 생겨나고 있다. 그 떨켜는 나의 일손을 놓게 할 것이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백 일이 지나면 일손을 놓고 물러나야 한다. 누가 흔들어서도 아니고 무슨 법칙 때문에도 아니다. 물러나는 것이 순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낙엽이 지면서 가지를 원망하지 않듯, 누구에 대한 원망도 미련도 없다. 낙엽이 진 자리에는 반드시 새움이 트듯, 내가 일손을 놓은 자리에는 또한 새 일손이 들 것이다. 지고 나는 것이 순리이듯, 놓고 드는 것 또한 순리가 아니랴.

낙엽이 있어 새 봄이 오듯, 일손을 놓아야 하는 나에게도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땅으로 내린 낙엽이 새 생명을 예비하듯, 내가 일손을 놓는 것은 제2막의 인생을 예비하는 것이다.

오늘 따라 발을 감싸는 낙엽의 촉감이 솜처럼 부드럽고 깃털처럼 사뿐하다. 어느 한촌에 짓고 있는 제2막 인생의 보금자리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늘은 그 벽에 꽃 장식의 타일을 붙였다고 한다. 꽃처럼 살아갈 새 삶이 되려는가.

깊게 쌓인 낙엽 속에 수없이 많은 길을 걸어온 발을 깊숙이 묻는다. 갖은 희로애락 속에서  살아온 내 지난 발자국을 묻으면서 '집으로 가는 길'을 다시 왼다.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가벼운 걸음으로 낙엽 진 산길을 내려온다. 사랑하는 이를 애무하듯 낙엽을 밟는다. 발이 따뜻해진다. 따뜻한 걸음으로 집을 향해 간다.

새로운 삶을 향해 간다.♣(20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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