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담을 쌓으며

이청산 2010. 11. 11. 09:57

담을 쌓으며



짓기 시작한 지 두 달 가까이 되니 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창문이 뚫린 벽체가 서고 그 위에 옥상 슬래브가 얹혔다. 다시 그 위에 방 한 칸의 이층 벽체가 서고 지붕이 덮였다.

생애 처음으로 지어보는 집이다. 처음으로 시작해 보려는 시골 살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에 시골서 태어나 자라긴 했지만, 철든 이후로는 도시 생활의 연속이었고, 지나온 생애 대부분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세월이 육십여 년이 흘렀다. 이제 정년 퇴직을 앞두고 제2막의 인생을 설계하면서 집을 짓고 있다.

퇴임 후에는 산수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조그만 집 하나를 지어 한가로이 살아가겠노라 하는 해묵은 꿈이 바야흐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 '한가로운 삶'은 두고 이루어 나가야 할 일이지만, '조그만 집'의 꿈이 지금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이 조그만 집 마당에는 사철 떨어지지 않는 푸성귀를 키우고, 그 마당 한 머리에 야외용 탁자를 놓고, 가끔은 이웃들과 함께 술잔도 기울이고……. 안주가 따로 필요할까. 채소 몇 이파리에 쌈장만 있으면 될 것이고, 간혹 아내가 부쳐내는 부추전이나 호박전이 있으면 더욱 좋고……. 마음부터 즐겁다.

중장비가 드나들어야 할 일이 끝날 무렵부터 담을 쌓기 시작했다. 대문의 문주부터 세우고 좌우로 담을 쌓아나간다. 담쌓는 일을 두고 아내와 조그만 다툼을 벌여야 했다.

마을이라야 열댓 가구에 수십 명이 살뿐인 이 한촌에 담이며 대문이 왜 필요할까? 없으면 너무 허전하잖아요? 더구나 집 위치가 동네 한복판 길가이고, 사람도 차도 계속 지나다닐 텐데요.

도시에는 있는 담도 허문다는데, 이 시골 마을에 담이 없으면 어때! 이웃끼리 오순도순 정답게 살면 좋지 않을까? 도시에 담 허무는 것은 기관들 말이지, 개인 주택 담을 누가 허문대요? 집을 포근히 싸 줄 울타리는 있어야지요.

한 번 둘러봐요. 이 동네에 대문 옳게 닫고 있는 집이 어딨어? 서로 네 집 내 집 없이 오고가고 하잖아. 서로 오고가고 할 때는 하더라도, 텃밭을 가꾸다 보면 웃통이라도 벗어제쳐야 할 때가 있잖아요.

여기서도 아내와 나의 이념(?)은 역연히 갈린다. 평생을 두고 아내는 현실주의자로, 나는 이상주의자로 살아온 그 이념의 벽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 다툼 끝에는 항상 현실론이 승리를 거둔다. 종내는 허약한 이상론이 단련된 현실론 앞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순박한 이웃들이 야속하게 생각하면 어쩔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도 담을 쌓기로 했다. 그래도 아주 높게는 쌓지 말고, 목을 조금만 빼면 담 너머가 보일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온 아내는 이웃의 눈길을 받으며 사는 것이 조금은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나의 마지막 제안은 못 이긴 듯 받아넘겼다.

담은 이곳과 저곳을 가르고 막는 벽이 아니라, 집과 사람을 감싸주는 품이라 생각하고, 담을 쌓기 위한 공사를 해나게 했다. 경계선 부분을 파내고 콘크리트를 부어 지반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며칠 후 튼튼하게 굳어진 지반 위에 담을 쌓으려는데, 이장이 찾아왔다. 길가 쪽 담을 집 쪽으로 좀 들여 쌓아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빈터로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담을 친다고 생각하니, 골목이 좁아 큰 차가 드나들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동네를 위해서 양보를 좀 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넓지 않은 땅에 담까지 들여  쌓으라니! 내 꿈이 또 하나의 벽에 부딪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집터를 마련하기 전까지의 꿈은, 이백 평 정도의 땅을 마련하여 오십 평 정도는 대지로 쓰고, 오십 평은 정원으로 꾸미고, 백 평은 텃밭으로 가꾸는 것이었다. 위치 좋고 경관 좋은 땅을 찾다가 그런 땅을 만나긴 했는데, 백 평이 채 될까말까한 조그만 땅이었다. 그래도 내가 바라던 위치요 경관이어서 주저 없이 차지했다. 좁으면 좁은 대로 모든 규모를 줄여서 소담하게 가꾸어 가려하였다. 그 귀한 땅을 내어 달라니!

내어 주기로 했다. 길에 들어가 있다고 내 땅이 아닌가. 길이란 나를 포함한 동네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닌가. 그 몇 뼘 땅을 독차지하려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차피 정 두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데, 인심을 잃고서 어찌 함께 살 수 있단 말인가. 집 안 쪽으로 다시 땅을 파서 기초 공사를 새로 할 때, 모든 동네 사람들이 보고 웃어 주었다. 나도 함께 웃었다.

아직은 살고 있는 곳이 따로 있어, 가끔씩 집을 짓고 있는 곳에 가서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오곤 한다. 집을 지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동네가 한결 돋보일 것 같다며 좋아해 주었다. 과수원을 하고 있는 이웃은 과일을 가져와 인부들에게 수고한다며 주기도 하고, 어떤 이웃은 요기할 수 있는 참 거리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소매를 집안으로 끌어 주안상을 내오기도 한다. 일을 지켜보다가 돌아올 때면 도회에서는 귀한 거라며 농사지은 푸성귀며 과실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이 신세를 언제 다 갚겠느냐고 하면, 정답게 지내면 되지 신세가 무슨 신세냐며 활짝 웃는다.

쌓여져 가는 담이 민망하다. 이런 이웃들이 사는 곳에 담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담이 높아지는 만큼 이웃들에게 미안함도 커진다. 담은 결코 가르고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감싸고 안아주는 울일 뿐이라 자위해 보지만, 담을 보면 미안해지는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뒷산 등성이로 노을이 곱게 물들고, 일을 마친 인부들이 연장을 턴다. 집 다지어지고 동네 사람이 되어 살게 되면 마음 속엔 담도 울도 일절 쌓지 않으리라, 한 인심이 되어 더불어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하려는데-.

담을 사이한 옆집 성 선생이 손목을 잡는다.

"잘 익은 술이 있어요. 딱 한 잔만 하고 가요-."♣(2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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