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상량식을 올리며

이청산 2010. 10. 14. 16:58

상량식을 올리며



 "庚寅年八月二十七日 上樑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 들여 써 나가던 박 선생은 맨 끝에 '龜'자를 쓰고, 들보를 돌려 맨 아래에 남은 정성을 다 바쳐 '龍'자를 쓰고 붓을 놓았다. 그리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평생 처음 지어보는 집이다. 남이 지어 놓은 집에 들어가 살아보기는 여러 차례 겪어 봤지만 내 생각대로 집을 짓기는 난생 처음이다.

퇴임과 더불어 한적하고 아늑한 벽촌 어느 한 곳에 제2막의 인생을 담을 조그만 집을 하나 짓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퇴임의 날과 함께 집짓기의 꿈도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기대와 두려움으로 몇 날밤을 지새기도 하면서 착공의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마련해 놓은 집터에 건물을 앉힐 위치를 잡고 터를 파서 철근과 콘크리트로 기초를 세우고 다시 흙을 채워 돋우었다. 그 위에 다시 철근을 깔고 콘크리트로 바탕을 놓아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십여 일만에 1층의 벽체가 다 쌓여졌다. 옥상과 2층의 바탕이 될 슬래브를 칠 차례가 되었다.

일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이 성의를 다해주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인부들의 참을 주기도 하고, 쉴 자리를 내어주기도 하는 이웃사람들의 도움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도 했다.

공사 책임자가 2층 슬래브를 치기 전에 상량식을 올려야 할 것이라 했다. 상량식은 어떻게 올리는 거냐고 하니, 술과 떡과 고기를 좀 마련해야 할 것이라 했다. 상량의 날을 기다리며 돼지머리며 떡, 술 그리고 굵은 타래실과 마른 북어를 준비했다. 멋지고 살기 좋은 집이 지어지기를 비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준비했다.

상량의 날이 왔다. 집이 지어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니 일하는 분이 상량문을 써야 할 것이라며 잘 깎은 커다란 각목 하나를 주었다. 천장에 얹을 들보였다.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다. 천장 높은 한옥의 대들보에 커다랗게 무슨 글자가 적힌 것을 보긴 했지만, 콘크리트 슬래브집에 상량문을 올려야 하는 것을 몰랐다. 급히 이웃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방으로 찾고 물어 그런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잘 쓰는 분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고희를 넘긴 노신사 한 분이 문방구가 든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이웃집으로 모셔서 용과 거북이 가운을 굳건히 지킬 상량문을 써 나갔다. 노신사 박 선생은 한 획 한 획에 갖은 정성을 다 쏟았다. 상량신 성주님께 일(日), 월(月), 성신(星辰) 하늘의 삼광을 감응하고, 수(壽), 부(富),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인간의 오복을 갖추게 해 달라고 썼다.

거실로 꾸며질 방에 상을 차렸다. 돼지머리와 떡시루를 얹고 삼색 과일을 차렸다. 상 앞에는 이웃에서 준 청주병이 놓였다. 막걸리를 제주로 준비하였지만, 오늘의 상량식을 위해 이웃이 선사한 별미의 청주를 쓰기로 했다. 상량식에도 의례와 절차가 있고 읽어야 할 축문도 있다지만, 정성만은 가득 담아 간략하게 치르기로 했다.

상량문을 쓴 들보를 앞에 두고 술을 따라 잔을 올리고 상량신에게 재배하며 빌었다.

"상량신이시여! 너그러이 살피시어 집을 짓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튼튼하고도 살기에 좋은 집이 지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이어서 아내도 재배하고 기원을 모았다.

술을 사방의 벽에 부으며 다시 상량신을 불러 집이 잘 지어지기를 기원하고 음복하였다. 상양 들보를 북어와 함께 타래실로 묶어 매달았다. 북어를 매다는 것은 밤에도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잡귀나 액운이 들어오는 것을 잘 지키라는 뜻이고, 실타래로 묶는 것은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길게 행운과 무병 무탈이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뜻이라 한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일 젊은 사람은 예순이 다 되어 가는 동네 이장인 것 같다. 묵은 인심과 인정들이 보이는 듯했다. 연전 이 지역 학교에서 근무할 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도 상량을 축하해주러 왔다.

아내의 손이 딸리는 것을 본 부인네들은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떡이며 김치를 썰고, 고기를 갈라 담아 내 놓았다. 모둠 모둠 모여 앉은 동네 사람들은 떡을 들고 술잔을 기울이며 덕담을 잊지 않는다.

"이젠 동네가 훤하겠어요."

"맞아, 마을 한가운데가 비어 있다가 이리 좋은 집이 들어서니 훤하고말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마을에 함께 살게 되어서."

"우리 동네의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요,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자, 다 같이 잔을 들고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 사시게 된 것을 환영하고 축하합시다!"

아직은 자리도 편치 못한 맨 바닥이고 까실한 벽돌이 사방을 둘러치고 있는 곳이지만, 인정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어둠이 사방을 감쌀 때까지 사람들은 일어설 줄 몰랐다.

이윽고 자리가 끝나고 동네 사람들이 화기로운 마음들을 남겨둔 채 돌아갔다. 술잔이며 빈 접시가 이리저리 낭자하게 흩어져 있다. 이건 또 웬 일인가! 누구는 전등불을 켜들고 오고, 누구는 빗자루를 들고 오고, 누구는 쓰레기봉투를 가져왔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모은 이웃들은 어질러진 자리를 순식간에 치워버렸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수고를 끼쳐 어쩌지요."

"뭘요! 같이 해야지요."

그들은 '같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명치끝에서 뭉클한 덩어리 하나가 솟아오르는 듯했다. 어느 때에, 어디에서 이런 인심과 인정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또한 누구에게 이런 마음들을 베풀어 본 적이 있었던가. 동네 사람들은 내가 이 마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넉넉하고도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집을 짓고 있다. 제2막의 인생을 살기 위한 새 집을 짓고 있다. 이제 나는 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내가 이들에게 어떤 이웃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삶의 터로 잡은 이 동네가 살기 좋은 마을이 될 수도 있고, 살기 힘든 마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상량제는 따뜻한 인정의 들보를 들어 올리는 일이었다. 그 들보에 넉넉한 인심의 아름다움을 새기는 일이었다. 인정을 짓고 인심을 새기는 집을 지어 그 인정과 더불어 그 인심과 함께 살아갈 일이다.

인정과 인심의 상량제를 올린 오늘, 이 마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정 깊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더욱 만발한 인정의 꽃이 피게 할 일이다. 그 찬란한 꽃밭이 되게 할 일이다. ♣(20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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