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집을 짓는다

이청산 2010. 10. 2. 16:47

집을 짓는다



 집터 한가운데에 자리를 깔았다. 잔에 술을 따르고 두 번 절을 했다. 아내도 절을 했다.

"성주신이시여! 무탈하게 집을 잘 짓게 해주소서.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집이 지어지게 해 주소서." 술이 터에 뿌려졌다.

굴착기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반듯하고 넓적하게 파고 흙을 걷어냈다. 레미콘 차가 달려 왔다. 개어진 시멘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간절하게 그려왔던 꿈이었던가.

퇴임할 무렵, 산이 있고 물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 오붓한 땅 몇 평 구하여 소담한 정원 하나 꾸미고, 남은 땅은 텃밭으로 일구어 사철 푸나무와 함께 살 수 있는 조그만 집 하나 짓고 싶었다.

퇴임 날짜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2막의 인생을 의탁할 곳,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어떤 땅을 구할까. 소문을 듣기도 하고, 돌아다녀도 보았지만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발품을 팔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찾아낸 땅은 몇 년 전에 근무지로 생활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운명 같았다. 그 땅이 있는 마을 옆에는 조그만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는 내가 늘 오르던 곳이었다. 눈이 와도 비가 내려도 해질 무렵이면 언제나 올랐었다. 하도 많이 오른다고 주민들이 내 이름을 새긴 표지석을 세워주기까지 했었다.

그 산봉우리 아래 동네에 조그만 빈 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땅을 보는 순간 망설임 없이 껴안아 버렸다. 내가 갖기를 원하는 넓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땅을 주저하지 않고 껴안았다.

열댓 가구가 사는 산 아래 동네, 마을 앞에 펼쳐지는 논들을 건너 산 그림자를 띄운 냇물이 흐르는 곳, 이층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로는 산을 보고 앞으로는 물을 보며 살리라 생각했다. 오늘의 인연이 지어지려고 지난날 그렇게 이 동네를 자주 다녔었던 모양이다.

그 땅을 껴안고 경사가 생겼다. 농촌진흥청에서 전국의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100선 마을'을 모집하는데, 마을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모습을 글로 풀어 응모를 했더니, 당당히 전국 100대 마을에 선정되었다. 시장님이며 지역 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다.

그 마을에 집을 짓는다. 내가 처음 꿈꾸던 넓이만큼은 아니어도, 잔디가 깔린 화단에 푸른 나무가 서고 꽃나무가 살고 있는 정원은 만들지 못할지라도 운명처럼 찾아와 운명처럼 집을 짓고 있다. 조그만 넓이지만, 큰 방 하나에 찾아올 손자들을 생각한 작은 방 둘, 거실 한쪽에 계단을 놓고, 이층에는 동쪽에 창을 달고 남쪽에도 큰 창을 낸 내 서재 하나-.

작지만 큰 꿈을 담을 집이다. 높다랗게 기초를 쌓고, 기초 틀 안에 흙을 채워 넣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정리하여 그 틀 안에 채워 넣는다. 시멘트를 부어 여물게 덮는다. 높고 넓적한 바닥이 생겼다. 내 삶을 바탕으로 깔아 마련된 바닥이다. 그 위에 벽을 쌓는다. 자연의 흙빛이 살아 있는 벽돌로 벽을 쌓는다. 둘레 벽을 쌓아 방을 가르고 거실을 나눈다. 쌓은 벽돌 안쪽에 단열재를 대고 다시 벽돌을 붙인다. 앞으로의 내 삶을 갈무리하듯 벽돌을 붙여 나간다.

이제 저 벽돌을 다 쌓으면 층을 가르는 슬래브가 얹히어 옥상이 되고 내 서재가 올라설 것이다. 서재는 뾰족한 팔작지붕, 그 처마 아래에는 '청우헌(靑遇軒)'이라는 현판이 걸릴 것이다. '청산과 만나는 집, 청산이 있고 만남이 있는 집'이다. 푸른 산처럼, 그 산의 나무처럼 살고 싶다. 가진 것들을 떨어뜨리고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다가, 때가 되면 다시 푸른 잎을 피워내는 나무 같은 삶을 살고싶다.

계단 옆에다가는 조그만 화단을 만들고 마당은 모두 텃밭으로 써야겠다. 비록 내 가슴팍보다 조금 더 넓을 뿐이지만, 그곳에는 사철 푸른 잎이 살게 해야겠다. 그 푸른 것들은 나의 식탁을 풍성하게도 할 것이지만, 그들은 내 가슴부터 먼저 시원스럽게 할 것이다.

대문 위에는 환하게 핀 능소화 덩굴을 올려 오는 이를 맞이해야겠다. 빛깔이 고우면서도 눈부시지 않고, 자태가 아리따우면서도 자못 기품이 있어 보이는 그 능소화를 올리고 싶다.

벽체가 높아지고 있다. 내 삶을 담을 공간의 윤곽이 점점 드러나 보인다. 저 공간 하나하나에 마디마디 내 삶을, 제2막의 인생을 담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겹다. 지나온 삶이 눈물겹고, 살아갈 삶이 눈물겹다. 내 삶을 이어지게 해준 감동의 눈물들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희노애락이 변전 무상했다. 사랑도 있었고 그리움도 없지 않았다. 기대도 있었고, 절망도 없지 않았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없지 않았다. 원망도 있고 분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그리움이다. 한결 같은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들을 초석으로 삼아 집을 짓는다. 제2막의 인생을 짓는다. 다시 푸를 삶을 짓는다.

높아지는 벽체 위로 가을 높은 하늘이 떴다.♣(20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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