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이청산 2010. 8. 12. 08:58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1.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 마음을 아릿해 할 때가 있다. 어려운 비유나 상징이 없는 담백한 표현이 오히려 심금을 쉽게 움직인다.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물론 이 노래도 흘러간 세월을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숱한 유행가 중의 한 구절이지만, '소녀'를 등장 시켜 지난 세월을 되새기고 있는 모습이 더욱 정감에 젖게 한다. '소녀'는 젊음, 청춘의 상징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런 노랫말에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을 보면 나도 그리 젊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 생애의 마감을 앞둔 시간 속을 살고 있다. 젊은 시절을 회억하고 있다.

 

2.

문예교육연구회 연수회에 잠시 시를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다. 하 선생이 출연하여, 어느 시인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를 들려주었다. 연수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하 선생은 두툼한 옷상자를 들고 있다. 낭독 순간을 위하여 따로 준비한 의상을 담은 상자다.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그 짧은 순간을 위해 하 선생은 의상까지 준비를 했다. 의상뿐 아니라 낭독할 시에 대한 이해와 감정을 더욱 속 깊게 준비했다.

하 선생이 낭독한 시의 눈물겨운 내용과 시인을 이야기하다가 세월과 늙음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게 되고, 나의 정년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아쉬우시죠?"

하 선생이 물었다.

"그래요, 세월이 언제 그렇게 가버렸는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명치끝이 살짝 저려왔다.

"묻지도 않고 가 버린 세월-. 그대로 한 편의 시네요."

하 선생이 말했다.

 

3.

하 선생이 쓰러졌다. 학기말 성적 처리를 다 마치고 담당 선생님에게 넘겨주려는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일면서 숫자 하나가 둘 셋으로 보이고, 속이 거북해지면서 머리가 내둘렸다. 체했는가 싶어 옆 사람에게 손이라도 좀 따 달라고 하려다가 의식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119에 실려 왔다고 했다. 너무 과로하여 신경에 바이러스 같은 것이 침투했기 때문이라 했다. 아픔을 무릅쓰고 말썽꾼 아이들을 교칙에 따라 처벌했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하 선생은 소귀에라도 경은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언제나 아이들과 한 마음이 되어 지내고 싶은 한 선생은 그들과 눈 높이, 마음 높이를 맞출 일을 궁리하다가 문득 아이들과 같은 옷을 입자는 생각을 해냈다. 아이들의 교복을 맞추어 입고 아이들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들도 놀라고 선생님들도 놀랐지만, 하 선생에게는 참 즐거운 일이었다. 아이들도 즐거워했다.

하 선생은 문학 작품의 낭송을 즐겨하는 낭송 전문가다. 낭송할 작품은 적어도 백 번 이상을 읽으면서 외운다. 그래야 자기의 마음에 들어왔다가 다시 작가의 것이 되어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엊그제는 의성의 단밀까지 이백 리가 넘는 길을 달려갔다가 왔다. 낭독할 시의 배경이 된 곳을 가 봐야 그 시에 깊이 몰입하여 낭독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소록도를 배경으로 쓴 어느 작가의 수필을 낭독하기 위해 소록도를 다녀왔던 일도 있었다. 전라도 사투리가 쓰인 작품의 낭독을 위해 그 고장으로 달려가서 말을 배워 오기도 했다. 하 선생은 언제나 꿈 많은 소녀처럼 살고 있다.

"열정적으로 사시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요."

그에게는 후회스런 시간이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설령 하 선생에게 후회스런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마저도 하 선생의 열정일 것 같았다.

 

4.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구석구석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 친구가 "여보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까지 정성스레 그린다고 누가 알겠나?"하자, 그는 "내가 안다네."라고 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말이겠다.

법정 스님이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에 써야겠다고 순간순간 마음먹게 된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모든 순간을 맑고 향기롭게 살다가 가셨다.

 

5.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흘러간 것은 그리워지기 마련인 인간의 상정 때문일까, 그 세월 속에 더 머물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까, 지나간 세월을 충실하게 살지 못한 데서 오는 회한 때문일까.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한 데 엉겨있기도 하지만, 역시 회한이 제일 큰 것 같다. 하 선생의 삶을 보니 더욱 돌아보인다. 님들의 말씀을 들으니 더욱 사무친다. 하 선생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왔던가. 님들처럼 성실하게, 가치 있는 시간을 살아왔던가.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을 미워하는 내 마음이 공허하고 허망하다. 어떤 세월이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간다던가. 물어 보게 만들기나 했던가. 그 말을 시 같다고 한 하 선생의 말이 얼굴을 붉히게 한다. 그런 무책임한 시가 어디 있는가.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나의 탓일지언정 세월의 허물은 아니지 않은가. 그 세월이 미워질 때 하 선생의 삶을 보고, 님들의 말씀을 들어야 하리라.

그리고 내 인생의 두 번째 막 속으로 걸음을 옮겨야겠다.

모든 것이 일기일회(一期一會)인 것을,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단 한 번의 인연인 것을.♣(201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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