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그의 아름다운 삶

이청산 2010. 8. 27. 13:13

그의 아름다운 삶



  그는 학창시절부터 시 읽기를 즐겨했다. 읽은 시는 모두 다 외웠다. 어느 성우의 낭송시들을 들으며 그처럼 멋지게 낭송할 수 있기를 애썼다. 그 세월 뒤에 그는 시 낭송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내 방을 찾아왔다. 시낭송회를 앞두고 나에게 낭송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내가 찾아가서 배워야 할 텐데 찾아와서 가르쳐 주는 것이 여간 고맙지 않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내가 낭독하고자 하는 시를 함께 읽으며 배경 음악을 골라주고, 자세를 잡아 주었다. 억양을 짚어주고 완급을 조절해 주었다. 그가 시 읽는 것을 들으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시일 것 같고, 제일 즐거운 것이 시 외우는 일일 것 같았다.

내 방에는 난분(蘭盆) 몇 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연옥빛 꽃 몇 송이를 피웠다. 족족 곧게 뻗은 잎새도 눈길을 잡지만, 번질 듯 말 듯 은은히 풍겨 나오는 향기도 마음을 끈다.

내 방을 다녀간 며칠 뒤 그는 나에게 시 한편을 들려주었다.

 

       당신의 방에서

      난(蘭)을 보았습니다

      그 정결한 자태에 넋을 잃어

      향내를 잊어버리고 있는데

      -향 한번 맡아보시지요.

      명화 속 여인의 미소를 닮은 향내가 순간

      방 안 가득히

      번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 당신의 향기였군요

      나는 그저 난향(蘭香)인가 했습니다

 

                                                                -난향(蘭香)

 

'당신의 향기였군요'-. '당신'은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일 것 같았다. 그가 바로 향기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 미술 교사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을 키우면서 학교생활을 함께 하기에는 어느 쪽도 충실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 두었다. 자기가 선택해야 할 최선의 길이라 믿었다. 정성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 아이들이 성실하게 자라 다들 제 역할을 잘 해 낼 수 있게 된 세월이 흘러갔다.

다시 자신의 삶이 돌아 보였다. 그림이며 시는 늘 생각에 두어왔던 일이었지만,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일들도 해 보고 싶었다. 사회교육 기관을 찾았다. '대화기법', '상담기법'에 관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이들 키우던 마음 못지않은 정성으로 열심히 배웠다. 그렇게 배우고 익히는 데 열정을 바친 시간들이 알곡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지금은 도서관이며 평생교육원을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에서, 혹은 마을회관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강좌를 맡고 있다. 지난날 열심히 배웠던 대화기법이며 청소년 상담에 대해서, 그리고 늘 관심을 두고 있던 POP 제작이며, 폼아트(Foam Art)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상담 자원 봉사자가 되어 직접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기회만 있으면 벽화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어깨가 몹시 아프다. 어느 시설에 대형 벽화를 맡아 그렸기 때문이다. 사방 4m나 되는 벽화를 다 그리고 나니 어깨가 무너지는 듯했지만, 듬직한 무슨 덩어리 하나가 명치를 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빛을 닮은 해맑은 빛깔의 벽화를 그렸다.

그를 두고 시쳇말로 '멀티 커리어(Multi Career)족'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보수를 받으면서 강의하고 일하는 시간보다, 즐거움으로 봉사로 하는 시간이 더 많다. 그는 '봉사'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란 무엇보다 즐겁기 때문이다.

그는 작업을 하거나 강의하는 시간 말고는 책에서 손을 떼는 시간이 드물다. 시를 즐겨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한다. 머리 속에는 아름다운 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 늘 아름다운 시간 속을 살고 있다. 아니 시간은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아름다움만 있을 뿐이다.

어느 날 벗과 함께 그가 모는 차를 타고 시골 어느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조그만 집을 지어 제2막의 인생을 살아갈 마을이다. 내 방을 감돌던 난향처럼 은은한 곳일 것 같다며, 가보고 싶다고 했다. 산 아래에 논들이 있고 조그만 강이 흐르는 마을일뿐이다. 마을을 본 그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해 주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자신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할 일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다. 그래서 그는 늘 바쁘게 달린다. 그러나 바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스런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달리고 있는 곳은 공간 속도 아니고, 시간 속도 아니다. 아름다운 삶 속을 달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삶'을 본다. 그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법정스님은 마지못한 삶, 순간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라 했다. 그는 현재의 모든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며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

아름답게 사는 데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쏟으면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무엇보다 아름다운 삶일 것 같다. 어떤 아름다운 삶도 자기의 삶을 최선으로 사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삶도 아름다운데, 그에게는 아름다운 시와 그림들로 가득 차 있는 머리와 가슴이 있어 그 삶이 한결 아름답게 보인다.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제2막의 인생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2010.8.25)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량식을 올리며  (0) 2010.10.14
집을 짓는다  (0) 2010.10.02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0) 2010.08.12
열정을 넘어서 -2010 인동고 워크숍 여정기  (0) 2010.08.05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0) 201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