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이청산 2010. 7. 29. 14:21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금오산 시낭송회'에서 



  무대는 흘러가고 있었다. '이 시가 저처럼……'하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객석은 조용했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키고서야 '남은 세월보다 지나온 세월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는 이 시……'하며 겨우 이어나갔다. 나와 같은 심정이라는 뜻을 이야기하려는데 왜 말문이 잠기려 했을까.

문협 사무국장으로부터 이번 '금오산 시낭송회'에 출연을 제의 받았다. 시도 쓰지 않는 사람이 시 낭송회에 어찌 참여할 수 있겠느냐며 사양했다. 수필 중의 한 구절이라도 좋고, 다른 시인의 시도 좋으니 '꼭 좀 출연해 주셔야 한다'며, 나 같은 사람이 출연해야 무대가 어울릴 것 같다며 간청했다. 내가 어찌 무대를 어울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대접해 주는 말인 것 같아, 매정하게 물리칠 수가 없었다. 얼떨결에 응낙하고 말았지만, 무엇을 낭독할지가 걱정이었다. 이것저것 뒤적이며 좋은 시를 찾다가 문득 마음에 잡힌 것이 신경림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가볍게 걸어가고 싶을 뿐, 가벼운 마음으로 노래한 시는 아닌 것 같았다. 신경림 시인은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과 울분을 노래했다. 정감 넘치는 운율과 친근한 시어로 서민들의 애환이며 민주화의 열망을 노래하던 생애도 흘러가고, 이제는 황혼기에 접어들어 지난날을 조용히 회상하고 있다. 민주화의 일선에서 굳게 잡았던 손들도, 거리를 메우던 함성도 돌이켜보니 모두 다 살갗에 묻은 티끌 같게만 느껴질 뿐이다. 불합리한 세상의 일들에 분노의 날을 세우기보다 조용히 자신 속에 침잠하여 삶의 의미를 음미하고 싶다. 이제야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은 것일까. '석양 비낀 산길'을 가볍게 걸어가려 하고 있다.

마치 지금의 내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그처럼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고 투쟁하는 생애를 보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럴만한 힘도 이념도 지니지 못했지만, 이제는 나도 한 생애를 돌이켜보며 지난날을 음미해 보아야 할 시간 속을 살고 있다. 머잖아 한 생애를 마감하고 새로운 생애를 시작해야 한다. 지나온 날을 돌이켜 보면, 미소를 띠게 하는 가슴 따뜻한 일도 없지 않았지만, 부끄럽고 욕되고 때로는 분노가 되어 속을 끓게 했던 일들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행복'이라거나 '보람'이라는 말들에 실감을 느끼며 그러한 말들 속에 가슴을 묻었던 적도 없지 않았지만, 이 풍진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괴로 불면의 밤을 새우던 날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쓸어 내고 털어 내고 싶다.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처럼 여기며, 툴툴 훨훨 털고 싶다. 그 모든 것들을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이 시를 외기 시작할 무렵, 4대강 사업 반대를 주도하는 등 정치권력과 치열하게 투쟁하며 불교계의 환경운동을 이끌어 오던 수경(收耕) 스님이, 어느 날 주지 자리며 환경연대 대표 그리고 승적까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잠적해 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다며, 자기에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으리라는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을 몸으로 읊어 준 것 같기도 했다. 한 생애의 마감을 앞두고 있는 내 처지와 함께, 수경 스님의 일을 생각하니 그 시가 더욱 폐부 깊숙이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글을 외워본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게 좀 힘든 일이었지만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길을 걸으면서 외우고, 산을 오르면서 외웠다. 땅거미를 보면서 외우고 긴 그림자를 보면서 외웠다. 그 때 구은주 시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낭독 전문가였다. 배경 음악을 골라주고, 억양을 짚어 주었다. 완급을 조절해 주었고, 자세를 잡아 주었다. 시를 외우는 일이 참 즐거운 일임을 그녀가 가르쳐 주었다.

고즈넉한 금오산 잔디광장의 해거름. 붉은 색 카펫이 깔린 무대 위에서 리허설을 할 무렵엔 가느다란 빗줄기들이 땅거미를 적시는가 싶더니, 낭송회가 시작될 무렵에 비는 자취 없이 잦아들고 휘황한 조명이 무대를 장식했다. 하늘도 낭송회를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객석에는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지역의 명사들이 앞줄에 자리잡았다. 무대는 젊은 가수들의 축하 공연으로부터 막이 올랐다. 의례도 인사 말씀도, 그 흔한 축사도 격려사도 없이 어둠을 꽃처럼 피게 하는 노래로 시작하는 것은 참으로 신선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박수 소리도 한결 가벼웠다.

회원들과 초청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이 이어졌다. 음악과 조명은 시의 분위기를 따라 바뀌어갔다. 무대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 낭송 사이사이로 청량한 소리의 악기 연주며 경쾌한 무용이 시의 흥취를 돋우어주었다. 젊은 여성 무용가들이 싱그러운 사위로 그려낸 춤에 이어 나의 순서가 왔다. 낭송법을 가르쳐 준 구 시인과 손을 맞추고 무대 곁으로 갔다. 사회자의 소개에 이어 무대에 올랐을 때 하얀빛이 온통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객석 한 쪽에 구 시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먼저 '집으로 가는 길'의 시인과 시의 이해를 겸해서 이 시를 낭독하게 된 소회를 잠시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지금 시인은 세상의 현상들에 대해 분노의 날을 세우기보다는 조용히 자신 속에 침잠하여 삶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는 부침해 온 세월을 뒤로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물러나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듯했다.

겨우 말을 끝내고, 낭송으로 들어갔다. 배경음악이 흘렀다. 구 시인이 사인을 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음악이 한 소절 흘렀다.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내 지나온 날을 다 얹듯 읊어 나갔다.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배경음악의 선율도 클라이맥스를 올라가고 후음으로 끓어오르는 나의 목소리도 격앙되어 갔다.

음악이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낭송이 끝나면서 음악소리가 잦아들자 객석에서는 박수 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무엇을 뜻하는 함성일까. 도시에 넘치던 그 함성이었을까. 아니었다. 내 목소리에 나의 심정에 공감해주고, 나와 한 마음이 되어 주는 함성이라 믿고 싶었다. 속에 엉켜 있던 그 무엇이 이제야 풀려 내리는 듯했다. 오늘밤 집으로 가는 길은 참 가볍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초청 무대에 이어 몇 회원들의 낭송이 계속되고, 성악가의 성악 무대를 끝으로 낭송회는 막을 내렸다. 회원들 모두 무대로 올라와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모든 순서가 끝났다. 찬란한 조명등 불빛도, 밤을 적시던 음악소리도 잦아들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던 관객들도 흩어져 갔다. 세월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듯 그렇게 모두들 빠져나갔다. 무대를 같이 했던 회원들과 막걸리 잔을 함께 나누며 낭송회 무대를 회상하다가 헤어졌다.

이제 정녕 '석양 비낀 산길'을 가볍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가볍게 걸으리라 외쳤기 때문이다. 생각이 말을 이끌게도 하지만, 말이 생각을 이끌기도 하지 않던가. 내가 낭송한 시는 나를 이끌 것이다.

한 생애를 마무리짓는 길을 가볍게 걸어가야겠다. 모든 것을 묻으면서-.

희망찬 또 하나의 생애를 위하여!♣(2010.7.27)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0) 2010.08.12
열정을 넘어서 -2010 인동고 워크숍 여정기  (0) 2010.08.05
비 내리는 낙화암  (0) 2010.07.19
아이들의 노래자랑  (0) 2010.06.29
산길을 걸으며  (0) 2010.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