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비 내리는 낙화암

이청산 2010. 7. 19. 16:53

비 내리는 낙화암



  부소산 근동에서는 소문난 집이라는 '구드래돌쌈밥'집에서 북적대는 나그네들 틈에 끼어 점심을 먹고 부소산으로 올랐다. 내리고 그치기를 거듭하고 있는 비가 언제 또 내릴지 몰라 서둘러 숟가락을 놓고 산성 길을 따라 올랐다.

'구드래'란 이름이 특이하여, 나중에 알고 보니 백제 어느 왕이 왕흥사에 예불 드리러 가다가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는데, 그 바위가 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불렀다는 데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어찌하였거나 재미있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매표소를 통과하여 숲 속에 블록을 깔아 잘 닦은 길을 따라 삼충사(三忠祠)를 향해 올라가니, 문화재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다.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삼충신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사당 안으로 안내하더니, 사당의 마루에 앉으라 하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백제의 흥망을 맛깔스럽게 풀어낸다.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어 641년에 즉위한 이래,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리기도 하면서,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을 만큼 치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재위 15년을 넘기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들의 간(諫)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가두거나 귀양을 보내며 국정을 돌보지 않는다.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맞아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면서 끝내 항복하고 만다. 태자 등 1만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듯 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왕비 중의 한 사람인 은고(恩古)가 왕의 마음과 권력을 함께 거머쥐면서 휘두른 전횡 때문이라기도 하고, 권력 기반을 다진 왕이 외형적으로 안정된 왕권에 안주하여 긴장감이 풀어진 탓이라기도 한다.

이러한 왕의 치세가 칠백 년 공고한 사직과 번성했던 나라의 문화를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하고 아름다운 산하 풍경에 비극의 전설을 덧씌우게 하고 말았으니, 사람살이에서 어떤 마음을 먹고 무슨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행·불행의 길이 극명하게 갈라질 수도 있는 것임을 의자왕에게서 다시 본다. 어디 의자왕만이랴. 지고한 군왕이든 여염의 범부든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다만 지위의 고하에 따라 그 마음과 생각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의 현대사를 점철해 온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에게서 보아온 것처럼.

백제 그 최후의 비극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부소산에 비가 내리고 있다. 해발 106m의 나지막한 산세에 지나지 않지만, 그 높이와 넓이보다 더 크고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산이다.

낙화암을 향해 간다. 숲 속 산책길을 따라 일천오백 년 서러운 사연을 안고 있는 낙화암을 찾아가는데, 부침해 온 백제의 역사가 서린 부소산 성터며 군창지, 영일대, 송월대 터가 어디 있다고, 풍광을 즐기기 좋은 사자루, 영일루, 반월루 가는 길이 어느 쪽이라고, 글자도 선명한 표지판들이 눈길을 잡지만, 비도 내리고 갈 길도 멀어 짐짓 못 본 체하며 앞으로만 나아간다.

소나무 숲 사이로 강물이 넘실거리는가 싶더니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우뚝 선다. 백화정(百花亭)이다. 험준한 바위들을 딛고 서서 출렁이는 강물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서 있는 지취가 자못 예사롭지 않다. 백마강에 몸을 던진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세운 것이라 하는데,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워 계단을 두어 마루로 오르게 하여 난간을 설치하고 천장에는 연꽃 무늬를 새겨 놓고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1341∼1371)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 노래한 그 물결과 흰 구름을 내려다보고 바라보기 좋게 하여 옛 사연을 절절히 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백화정(百花亭)'의 그 백화는 꽃다이 떨어져 갔던 백제 삼천의 여인들을 상징한 것일 듯한데, '삼천화'라 하지 않고 '백화'라 한 것이 친근한 소박미를 더해 준다. 적군들에 의해 나라가 허망하게 무너지자, 죽기보다 더 몸서리칠 굴욕을 피하여 치마를 뒤집어쓴 채 송이송이 꽃이 되어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광경이 어떠하였을까.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꽃 같은 미인들은 수없이 떨어진다. 자개잠, 금비녀는 내려지고, 머리채는 흐트러지고, 치맛자락은 소리치며 펄렁거린다. 그리고, 옥패는 마주쳐 땡그랑거리고 풍덩실풍덩실 물소리는 난다.'(수필 '낙화암을 찾는 길에')라고 한 적나라한 상상은 달리 더 보탤 말을 잃게 한다.

바위 위에 서서 보니 오히려 그 높이와 크기를 오히려 알 수 없다. 얼마나 높고 험할까. 이곳을 처음에는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하나 뒷날 '낙화암(落花巖)'이라 고운 이름을 붙여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로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것은 이뿐 아니다. 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궁녀가 삼천에 이른다 하는데, 과연 그토록 많았을까.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궁녀 삼천 명을 두기도 어렵겠거니와, 궁궐이 아무리 넓다한들 삼천 명이 거처할 궁실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이야기는 타사암을 낙화암이라 한 것과 더불어 비극미를 더욱 고조하기 위한 후일의 스토리텔링일 것 같다. 삼십도 아니요, 삼백도 아니요, 삼천이라 하니, 그 엄청난 비극이 듣고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에지 않는가.

독일 라인계곡의 로렐라이 언덕 아래가 지형이 하도 험하여 이 계곡으로 배를 저어가던 사람들이 난파를 당해 가끔씩 목숨을 잃기까지도 하는 것을, 독일 작가 클레멘스 폰 브렌타노(Clemens von Brentano, 1778∼1842)가 소설 '고트비(Godwi)'를 통해 묘령의 처녀가 선원들의 마음을 빼앗아 배를 난파시킨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로 꾸며 로렐라이 언덕이 모든 여행자들이 동경하는 명소가 된 것처럼, 낙화암도 스토리텔링에 의해 사실이 더욱 극화됨으로서 감동을 더하여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노래와 그림으로 새기고 싶을 만큼 명소가 되게 한 것 같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 1497∼1548)은 '낙화암(洛花巖)'이라는 시로,

 

"國破山河異昔時(국파산하이석시)

 獨留江月幾盈虧(독류강월기영휴)

 落花巖畔花猶在(낙화암반화유재)

 風雨當年不盡吹(풍우당년부진취)

나라는 깨어지고 산하도 옛날과 다르니,

홀로 강에 머문 달은 그 몇 번을 차고 이지러졌음이오.

낙화암 언덕에 꽃은 아직 피었으니,

비바람 치던 그 해에 모두 날리지는 않았음이라"

 

라 노래하여 아직도 그 꽃송이가 눈에 보이는 듯한 감회를 읊고 있는 것을 보아도, 백마강과 더불어 낙화암 그 애절한 사연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로 시작하는 이인권의 '꿈꾸는 백마강'이며,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로 이어지는 한복남의 구성진 노래 '백마강'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였던가.

로렐라이 이야기를 두고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가 시를 쓰고 작곡가 질허(Philipp Friedrich Silcher, 1789∼1860)가 곡을 붙인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가곡은 로렐라이의 구슬픈 전설과 함께 전 세계인의 애창곡으로 불리게 되고, 그리하여 '로렐라이 언덕'이 아름다운 전설의 현장이 된 것처럼, 백마강 낙화암은 아릿한 그리움을 지닌 전설과 역사의 현장이 되어 우리에게 각별한 감회를 안겨주고 있다.

백화정 옆에 우람한 줄기를 몇 갈래로 뻗어 올린 노송이 한 그루 서 있다. '천년송'(千年松)이라 이름하였는데, 낙화암 그 깊은 사연을 어느 누구, 어떤 것보다 가장 오래 듣고 보았을 것 같다. 그 나무 옆에는 작자도 밝히지 않은 글이 그 유서를 말해 주고 있다.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 년 백제 역사 오롯이 숨쉬는 곳

 낙화암 절벽 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런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 마음

 

바위를 내려가니 삼천 궁녀의 비극이 깃들인 백마강을 가까이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산기슭에 암자처럼 소담한 절집이 자리잡고 있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여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028년 고려 현종 때 지었다는 고란사(皐蘭寺)다. 절 뒤의 바위에서 자생하고 있는 희귀식물인 고란초(皐蘭草)의 이름을 따서 고란사라 하였다지만, 이 절은 태생부터 백제 여인들의 비극을 안고 태어났다. 듣는 이의 구곡간장을 올올이 찢어준다는 고란사 종소리는 들을 수 없고, 목책으로 둘러친 종각에 갇힌 채 중생의 범접을 막고 있다. 의자왕이 즐겨 마셔 어용수(御用水)라 불리기도 했다 하고,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삼 년씩 젊어진다고 하는 고란정 약수의 전설이 이 절의 유서를 지켜주고 있다.

황포돛배가 떠 있는 강으로 내려간다. 강은 상기도 비에 젖으며 옛일을 애달프게 되새기게 하고 있다. 배를 탄다.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더니 이물을 돌려 내려가며 낙화암을 조망하게 한다. 수풀 속으로 언뜻 드러나 보이는 바위 위에 백화정이 높다랗다. 물은 속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넓게 흐르고 있다. 이 물도 금강의 줄기이거늘 낙화암 아래 물만을 왜 백마강이라 하는가.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부여로 건너가려는데, 그 때마다 물결이 거세게 일어 건널 수가 없다. 강에는 백마고기를 좋아했던 무왕이 죽어 용이 된 넋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소정방은 백마고기로 꾸민 대나무를 미끼로 삼아 강을 지키고 있는 용을 힘들여 낚아 내치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 후로 백마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이 또한 백제 멸망의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전설이라 할 것이다.

강물은 하얀 모래 결을 안고 굽이돌며 흐르는데, 공룡 같은 굴착기가 바닥을 긁고 있다. 여기도 4대강 사업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저렇게 긁어내면 강이 더욱 맑고 푸르러질까. 물줄기에 서리서리 서려 있는 애틋한 전설마저 긁어 내버리지는 않을까. 굴착기 뻗는 갈퀴에 가슴이 철렁거린다.

배는 낙화암을 감싸 안으며 흐르고 있다. 낙화암을 앞에 두고는 차마 두고 떠나기 아쉬운 듯 물 위를 돌고만 있다. 일천오백 년 전설을 품은 채 함묵으로 서 있는 낙화암에 비가 내린다. 그 날 내리던 꽃비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백마강이 젖고 있다. 그 날 젖어들던 꽃송이처럼 비가 젖어든다. 아리따운 슬픔이 되어 젖어 들고 있다. '落花巖' 그 붉은 글씨가 푸른 잎새들 속에서 그 날의 핏빛처럼 선연한 빛을 드러내고 있다.

돛대에 높이 단 확성기에서는 그 날의 가슴 아린 이야기들이 풀려 나오고 있다. 꽃비 되어 떨어져 내리던 백제 여인들의 사연이 올올이 풀어진다. 구드래나루터에 닿을 무렵 확성기는 구슬픈 가락을 풀어 꽃비에 젖는 백마강을 다시 적시고 있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 년의 한이 맺힌

일편단심 목숨 끊은 앞치마가 애닯구나.

아, 낙화 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 궁녀를.♣(2010.7.18)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정을 넘어서 -2010 인동고 워크숍 여정기  (0) 2010.08.05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0) 2010.07.29
아이들의 노래자랑  (0) 2010.06.29
산길을 걸으며  (0) 2010.06.29
제주 용눈이오름  (0) 2010.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