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바람과 더불어

이청산 2009. 12. 15. 08:48

바람과 더불어



날씨가 차가와 지고 있다. 겨울이다. 바람이 분다. 나무들은 마른 잎을 땅으로 내려 앉힌다. 한 계절을 정리하고 있다. 지난날의 무상했던 색깔들을 떨칠 것은 떨치고 남길 것은 남긴다.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날들이 돌아 보인다. 요즈음 와서 가끔씩 지나간 시간들이 돌이켜진다. 내 삶도 이제는 어느 정도의 더께가 끼고 켜가 쌓인 모양이다. 한 계절을 마무리해야 할 때에 이른 것 같다. 내 삶에 쌓여온 세월의 켜는 어떤 것일까.

지난해에 갑년이 지났다. 반평생을 넘게 살아온 셈이다. 살아갈 세월보다는 살아온 세월을 더 무겁게 지고 있다. 아니,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갔다. 내 생애의 시간들은 차 있는 자리보다 빈자리가 넓어진 것이다.

담담하고 무신경할 수 있다. 그렇게 비어버렸다 해서 애통해 할 일도 처연해 할 일도 아니다. 누구나 맞이해야 할 빈자리가 아닌가. 어찌 사람만 그러하랴. 차면 비워지는 것이야 만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아쉬운 게 있다면 생애의 업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또한 자연의 이치로 치부하여 훌훌 털어 버릴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십 년 가까이를 해오던 '일'을 하루아침에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찌 태연할 수만 있으랴.

지난 세월이 다시 돌아 보인다. 군대를 갔다오고, 학업을 마저 이어 졸업하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사회에 첫발을 딛던 때가 그리 멀지 않은 일 같은데, 어느새 그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그 '사회'를 떠나야 할 날이 저무는 날 땅거미처럼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그 '사회'를 살기 시작 이후 오직 외길로 한 생애를 걸어 왔지만, 그 외길 속의 길은 결코 외길이 아니었다. 여러 타방 객창을 전전해야 했고, 수많은 일들과 마주쳐야 했다. 여러 곳을 떠도는 사이에 정 들고 들일만한 곳도 있었지만, 외져 외로운 곳도 없지 않았다. 신명과 보람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많았지만, 고통과 고뇌 속을 헤매야 했던 일도 없지 않았다.

사는 일이 어찌 순조롭기만을 바라고, 걷는 길이 어찌 평탄하기만을 기대할 수 있으랴.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함께 해 왔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외로움, 희망과 절망, 욕심과 허심, 이기와 이타, 화합과 불화 들이 모두 좋든 싫든 내 삶을 엮어온 구성 분자들이었던 같다.

다시 내 삶을 돌아본다. 내가 가야할 길을 별 말없이 뚜벅뚜벅 걸었다. 걷다 보면 잘 트인 길을 만날 수도 있기도 했지만, 돌부리 험한 길이며 지나기 어려울 만치 좁고 가파른 길도 없지 않았다. 잘 트인 길이야 몸 가볍고 신명나게 걸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길 앞에서 나는 참 어리석었다.

험하고 어려운 길을 만날 때면 어떻게 하면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 이것저것 잘 따져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갖지 못했다. 앞일을 잘 계산하여 이득은 취하고 손해는 버리는 일을 잘 못했다. 무엇을 잡으면 득이 될지, 무엇을 놓치면 실이 될지에 대한 판단에 몽매할 때가 많았다. 내 나름의 계산과 판단이 나의 선택과 고뇌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그 때는 바람에게 나를 맡겼다.

내 삶의 역정에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일이 많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불려 갔다. 물론 바람은 나를 위해서만 불어주고, 내가 가고 싶은 데로만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별 이롭지 않은 곳으로 나를 데려 가기도 했다. 그 때는 남이 나에게, 나도 나에게 참 '덩둘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바람에 나를 맡기는 일을 그만 두지 못했다. 내 고뇌의 끝은 항상 바람이 찾아왔다. 부르지 않아도 왔다. 그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맡겨지곤 했다. 바람이 나를 희망의 땅, 보람의 시간 속으로 데려 갈 때도 많았다. 그 때는 희열감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생애의 많은 부분을 바람과 더불어 살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한 생애가 지났다.

그 한 생애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문득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내가 우물쭈물할 때면 고맙게도 바람이 불어주었다. 그 바람으로 '우물쭈물'의 개울을 건너가곤 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은 더 살며 두고 새겨 보아야 할 것이겠다.

북녘에 고향을 둔 어느 시인은 만주에 가서 압록강을 건너다보면서 '바람아 우리 언제 모여 맛있는 밥 먹으러 가자'면서 바람에게도 밥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나도 바람에게 밥을 사 주고 싶다. 시인은 바람을 향해 고향 그리운 마음을 전하고 있지만, 나는 내 삶을 떠밀어준 바람을 향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직도 나는 바람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이제 내 생애의 한 장면이 끝나고 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생애를 시작해야 한다. 한 생애를 정리하는 일에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에도 여전히 계산이 잘 서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매우 총명하게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또 바람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내 삶의 가지에 달린 낡고 늙은 잎들을 적절히 떨어뜨려 새로운 삶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고, 윤기 나는 새잎을 돋게 해주어 새 삶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그렇게 바람과 더불어 내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 바람이 불어주는 방향으로 안겨 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어느 때에야 내가 바람에게 밥 한 그릇 사 줄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미에게 안겨서만 사는 덜떨어진 아이같이…….♣(200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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