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두 자매

이청산 2010. 1. 11. 20:44

두 자매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처형은 문학관 안을 돌며 시를 감상하고, 시인의 생애도 더듬고 있는데, 아내는 어디로 갔을까.

십이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모처럼 두 자매가 함께 나들이에 나섰다. 일흔 살과 예순 한 살의 두 자매. 처형이 아내에게 바람 좀 쐬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간청하는 것을, 줄곧 미루기만 하다가 해가 다 가기 전에 한 번 들어주어야겠다고 나선 길이다. 아픈 곳은 없지만 허리가 조금 굽은 처형은 혼자서 길을 나서기가 힘들고 거북해 운전을 하는 아내에게 나들이를 부탁한 것이다. 일 없이 문 밖을 나서거나 차 모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 아내는 언니의 부탁에 핑계만 대 오다가 큰맘 먹고 핸들을 잡았다. 두 남자도 함께 따라 나섰다.

처형에게 어디를 가고 싶으냐 물으니 오랜만에 고향인 영양으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영양은 두 자매와 동서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몇 년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중앙고속도로를 내쳐 달려 안동을 지나 영양으로 향했다.

영양 읍내로 들어 화천리에 가서 아버지의 산소를 먼저 찾아 오랜만의 인사를 드리고 일월의 주실마을로 향했다. 처형이 조지훈문학관을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웃으며 '언니가 시를 아느냐?'고 하니, 처형도 '왜 나는 시를 알면 안 되느냐?'며 웃음으로 받았다.

시인의 숲을 지나 문학관에 닿았다. 문학관 안으로 든 처형은 관람 행로를 따라가며 지훈의 시며 책들을, 그리고 시인의 가족과 생애를 이야기해 놓은 패널들을 유심히 살폈다. 시를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처형이 지훈시공원으로 올라가 '참 좋아! 좋은 말이야.'하며 바위에 적힌 시들을 읽고 있을 때에도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시공원을 내려와 호은종택에 이르렀을 때야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데, 손에는 고들빼기 뿌리가 들려 있었다. 아내는 문학관 앞 들판에서 줄곧 나물을 캐고 있었다고 했다. '왜 문학관엔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처형이 물으니, '난 시보다 나물이 좋아!'하며 돌아섰다.

처형은 청기로 가자고 했다. 어릴 적 다니던 학교를 보고 싶다고 했다. 산골짜기를 헤치고 개울가로 난 길을 감으며 조그만 초등학교로 찾아들었다. 학교는 조그만데 해묵은 느티나무는 우람한 고목 되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기야! 저기 우리 교실!' 오륙십 년 전의 그 교실이 그대로 있다며 놀라운 것이라도 발견한 듯 처형이 소리쳤다. 문을 밀고 들어 가보려 했지만 무인경비 시스템이 작동중이라는 경고와 함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교실 풍경을 보며 처형은 지난날의 아스라한 추억을 그려내고 있었다. 교사 주위를 돌며 조례대에 올라 운동장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그네를 타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아내는 또 어디를 갔을까. 마른 풀 나부끼는 운동장 한 쪽에서 또 무얼 캐고 있었다. 아내는 남의 추억에 동참하는 것보다는 나물이 좋은 모양이다.

아내와 처형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로 갔다. 많지 않은 집들이 서로 어깨를 겯듯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끼어 있는 창연한 고옥이 보였다. 아내와 처형이 태어난 곳이라 했다. 처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득한 기억들을 살려내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아내는 집의 모습이며 집 안의 정경들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처형이 시집을 갈 때까지는 별 모자람 없는 살림살이가 유지되었지만, 그 후에 시절의 모진 풍상을 겪게 되어 힘든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는, 언젠가 내게 들려주던 아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처형이 시집을 갈 무렵 아내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두 자매가 겪은 일이 다르다 보니 고향집을 바라보는 감회도 다를 수밖에 없나 보았다.

아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이르렀다. 이미 폐교가 되어 교적비만 교문 문설주 곁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운동장에는 이리저리 어지럽게 패여 있는 자동차 바퀴 자국에 흙탕물이 볼썽사납게 고여 있었다. 교문 앞에 차를 멈춘 차에서 아내는 내리지 않았다. 모교의 모습을 둘러보고, 옛 교실에도 한 번 가보라고 권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운동장 어디에도 캘 만한 나물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아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운동장에 널브러진 흙탕물을 딛고 들어가 허물어져 가는 교정을 보노라면 어렵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떠오를 것 같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내의 동생인 처남은 시인이다. 근래에 다섯 번째의 시집을 내었는데, 그 시집 속에 이런 시가 있다.

"시인은 언제든지 물 곁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물 곁으로 가서 가만히 손을 넣어 물의 체온을 재는 사람이다. 시인은 언제든지 나무 곁으로 다가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가령 들메나무 곁으로 가서, 들메야, 하면서 가장 깊이 끌어안을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한 시다. 처형이 조지훈문학관을 보고 싶다하고, 수십 년 전에 다닌 학교를 보고 싶다 한 것도 남매 간에 닮은 시적인 감수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왜 그런 감수성이 없는 것일까. 너무 힘들게 살아오는 사이에 그런 마음들이 메말라 버린 탓일까.

격변의 세월 탓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살림살이를 지탱해 오면서 동생을 힘들게 공부시키고, 그리고 나를 만나 삼십여 년을 함께 살아오는 사이에 온갖 고생 다하고…….

그래서 아내에겐 돌이켜 과거를 추억하는 감성보다는 현재를 이겨내어 살아가는 일에 더 골몰해야 했던가 보다. 시보다는 고들빼기 한 뿌리가 더 낫고, 여행을 다니기보다는 여행비로 맛있는 반찬을 해 먹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처형은 그래도 가슴 한 자리에 꿈을 갈무리하고 있는 듯했지만, 아내는 오직 매몰스런 현실 속을 고심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꿈은 꿈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모두 제 몫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꿈도, 현실도 모두 소중할 수 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을 고르게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도 아내만을 탓할 수 없는 것은, 아내의 힘든 삶 속에 차지하고 있는 내 자리가 결코 작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내의 주름살이 오늘 더욱 깊게 패인 것 같다.

두 자매는 이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운전대를 잡은 아내의 얼굴 위에 노을 지는 햇살이 아릿하게 스며든다.

처형은 오늘 여행이 참 즐거웠다 한다.

아내는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200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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