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중등문예』와 리어카

이청산 2009. 12. 8. 16:03

중등문예』와 리어카



내가 『중등문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견일영 선생님을 만나면서 부터다. 경북교육청에 장학사로 근무하던 견 선생님이 1982년3월1일자로 영재교육연구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구미고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나면서, 경주여고에 근무하고 있는 나도 같은 학교로 발령 나게 했다.

1979년10월에 창립된 경북중등문예교육연구회(이하 연구회)는 여영택 초대회장, 이원성 총무 체제로 회무가 진행되어 1982년10월에 『중등문예』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견 선생님과 내가 만난 한 해 뒤인 1983년10월29일 정기총회에서 견 선생님이 회장으로 선출되자 나를 총무로 지명함으로써, 연구회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회원 조직이 따로 없었고, 매년 화랑교육원에서 개최되는 화랑문화제 때가 정기총회 날이었고, 백일장 인솔교사가 모두 회원이었다. 견 선생님이 회장으로 선출되던 때도 화랑문화제 백일장이 열리던 날이었다.

그 날로부터 회무를 인계 받아 조직을 정비하고 사업을 계획해 나갔다. 최입기 경북교위 중등교육과장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경북교위 김중균, 윤집섭, 이동제 장학사와 몇 문인 선생님을 상임이사로 위촉했다. 그리고『중등문예』2집을 발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1984년이 되었다. 3월1일자로 내가 화원여고로 발령이 나고, 4월20일자로 견 교감선생님이 대구시교육위원회 전문직으로 전근 되었다. 당시 경북과 대구 사이에 교원 인사 교류는 간혹 있었지만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구회는 하루아침에 선장을 잃고 말았다. 견 선생님에게는 축하할 일이지만, 연구회로 봐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 혼자서 회무를 쥐고 있으려니 암담한 생각마저 들었다. 당시에는 부회장 제도도 없었고, 회장이 없이 회무를 추진하기란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몇 달이 흘러 방학을 맞은 8월에야 겨우 이사회를 열어 이원성 이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다시 체제를 정비하여 『중등문예』2집 발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작품은 전년도 화랑문화제 입상작을 평과 함께 실으면 되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육청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없었다. 출판비는 책을 출판하여 각 학교로 보낸 후 책값을 받아 충당하기로 하고, 「그루사」에 출판을 부탁하였다. 당시 「그루사」는 이은재 사장이 혼자서 모든 역할을 하며 경영하는 작은 출판사였지만 책은 꼼꼼하게 잘 만든다는 평이 나 있었다.

우선 도내 문인 선생님들 몇 분에게 학생 작품을 우송하여 평문을 붙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때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일이 봉함하여 회송 봉투까지 넣어서 등기 우편으로 보내고, 그렇게 받고 해야 했다. 시일도 많이 걸리었지만, 일도 많았다. 학생들의 문장 학습에 도움이 될까 하여 여영택, 김시헌 선생을 찾아가 시와 산문 쓰기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글을 청탁하였다.

당시에는 청타라고 하여 두꺼운 마분지에 타자하여 투명지를 붙여 그 위에 교정을 보아야 하는데, 타자 기계로 일일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치다가 보니 교정 거리가 많이 발생했다. 상임이사가 있었지만 모두 원거리에 있고, 달리 회무를 도와 줄 사람도 없어 모든 일이 고스란히 총무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드디어 『중등문예』제2집이 나온 것은 1984년 10월이었다. 큰 산고 끝에 나온 것이라 기쁨도 컸지만, 나온 책을 처리하는 일도 큰 문제였다. 5백여 곳의 중․고등학교 앞으로 책값을 좀 보내달라는 호소문(?)과 지로용지를 함께 넣어 학교 규모에 따라 1~3권씩을 포장하였다. 출판사에 사장 말고는 사람이 없다가 보니 내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퇴근 후 출판사로 가서 일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토요일과 일요일은 온전히 『중등문예』에 받쳐야 했다.

어느 날 늦은 오후에 포장한 책을 리어카에 실었다. 출판사가 있는 대구 대신동 서문시장 앞에서 출발하여 리어카를 끌고 포정동의 대구우체국으로 갔다. 그 당시에는 승용차나 용달차를 이용하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천 권 가까운 책이 무겁긴 좀 무거운가. 우체국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흠씬 젖고 팔과 다리에 힘도 모두 빠져 버렸다. 우편물의 접수를 위해 직원들이 늦게까지 기다려 주는 고마움에 피로감을 떨치며 책의 발송을 마쳤다. 그렇게 하여 그 때 우리의 『중등문예』는 리어카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학교로부터 책값을 받아 출판비를 건지는 일이었다. 쉽게 보내주는 학교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잘 보내주지 않았다. 당시 도교육청 윤진섭 장학사님이 각 학교로 전화하여 책값 송부를 독려해 주었다. 나중에 대구의 소문을 들으니, 대구중등문예교육연구회(대구와 경북이 분리되면서 연구회도 분리됨)에서도 그렇게 책값을 받다가 강매에 의한 영리 행위를 한다고 어느 인사가 교육청에 투서를 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경북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학교에서 들어오는 돈을 푼푼이 적립하여 출판비에 충당하는데 그 걸로는 모자라서 달리 출판비를 보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화랑교육원에서 화랑문화제가 개최되던 날, 책을 교육원 정문에 갖다 두고 백일장 참가 학생이며, 인솔교사에게 한 권에 1,000원씩 받고 팔았다. 그 당시에는 1,000원도 결코 쉬운 금액이 아니었다. 그럭저럭하여 출판비를 충당하면서 회지의 발간 업무를 마리지어 가는 사이에 1984년이 저물어 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다른 나라에서 있었던 일들 같기도 하고, 그 일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엄두를 내었는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고초가 중등문예연구회에 대한 나의 애정을 더욱 다져 주게 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이후에 임원진도 개편되어 총무이사에서 물러났지만, 연구회에서는 나에게 영예스럽게도 상임이사라는 직함을 주어 내 교직 생애를 늘 연구회와 함께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1990년 5집부터는 교육위원회(1991년부터 교육청으로 개편)에서 장학자료로 발행해 주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교육청의 연구회 육성 및 지원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지원금도 받아 연수회도 하고 회지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순탄하게 잘 발전해 갈 줄 알았던 『중등문예』에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쳐왔다. IMF의 폭풍이 『중등문예』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1997년 12호를 끝으로 발간이 중단되고 말았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불씨가 결코 꺼지지는 않았다.

새천년인 2000년이 되면서 사회 전반의 변화와 함께 경북교육청의 형편도 좀 나아지게 되어 장학자료를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당시 권기을 장학사가 문예교육의 발전을 위한 장학자료로「교육가족 글 모음집」편찬을 구상하다가 『중등문예』의 부활로 방향을 틀어잡았다. 그리하여 동면에서 깨어나듯 『중등문예』13집이 경상북도교육청을 발행처로 하여 기지개를 켜고 나오게 되었다. 『중등문예』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권 장학사의 공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부활한『중등문예』가 2005년 18집부터는 전자 문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란한 전자 정보 시대를 살면서 전자 문서도 문서 생활의 한 수단으로 충분히 인식되어야 할 것이고, 생활 속에서 활발히 활용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종이 위의 활자 속에 담겨 있는『중등문예』의 역사와 추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중등문예』의 역사가 중단된 것 같아 아쉬움을 크던 차에 2006년도에는 손수성 회장의 노력으로 문인 교원들이 필자로 참여하는 「중등교원문예」(사람에게만 피는 꽃) 제1집을 발간하여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도에는 김선굉 회장에 의해  「중등교원문예」(사람을 키우는 꽃) 제2집이 발간되고, 올해에도 제3집을 발간할 계획이라 한다. 이제 연구회의 역사는  「중등교원문예」로 새롭게 새겨지고 있다.

더 고무적인 것은 하계․동계 연수회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알차고 내실화되어 문예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연수회는 우동식 회장의 주선으로 경북교육연수원에서 열렸는데, 문태준 시인과 박상률 소설가를 초청하여 시와 소설의 창작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수많은 회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 날의 강의가 우리의 문예교육을 더욱 살지게 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계 연수회에 거는 기대도 자못 크다.

내가 4대 회장을 역임했던 경북중등국어교육연구회와 더불어 문예연구회는 내 교직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향수가 오롯하게 담겨 있는 곳으로 내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교직을 물러나야 할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연구회는 나를 고문으로 임명해 주었다. 유쾌하게 고문(?)을 당하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기꺼이 고문직을 수락했다. 연구회에 대한 내 애정의 한 표현이 될까 해서였다.

 앞으로도 우리 연구회는 어떤 방식으로 든 진화와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문예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청소년들의 건전한 정서와 감성의 계발을 위하여 꾸준히 이바지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빌고 있다. 내 고향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그 향수가 더욱 향기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빌고 있다.

리어카의 추억, 그 애정에 실려 있는 나의『중등문예』여, 영원하기를!

그 영원 속에서 더욱 찬란한 빛을 더해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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