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마성에 뜨는 해

이청산 2010. 1. 11. 20:51

마성에 뜨는 해



꽹과리며 북과 장구로 어우러진 풍물패들의 우렁찬 풍물 소리는 신명나고 흥겨운 어깨춤과 함께 산성 마루 곳곳을 울려 퍼지며 추위와 어둠을 벗겨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마성에 떠오를 새 날의 새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로 달릴 걸 그랬나. 해가 떠오를 때까지 도착을 못하면 어쩌나. 초조한 마음으로 해평을 지나 상주로 뻗친 국도를 달려나갔다. 다행히 길은 잘 트여 있었다. 열이레 둥근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상주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점촌 방향으로 들었다. 산과 들이 동트는 여명 속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호계를 지나 진반교반에 닿았다. 산성 난간에 달린 청사초롱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올해도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호국의 든든한 요새가 되었던 고모산성에서 새 해를 맞으려 하고 있다.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성으로 올라갔다. 산성 옆의 둔덕에 결린 "경인년 새해 福 많으세요" 대형 현수막 앞에는 해맞이꾼들이 동쪽으로 눈길을 모으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 둘러쳐진 천막 안의 커다란 솥에서는 떡국 물이 하얀 수증기를 내 뿜고 있고, 돼지머리며 떡과 과일로 진설한 제단에는 기운찬 호랑이상이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마성 사람들과 반가운 악수를 나누었다. '혹 못 오시면 어쩌나?' 하고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고 했다. '못 오다니요! 어련히 와야지요.' 기다려 준 마음들이 추위에 언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며칠 전에 해맞이 행사의 집례를 맡고 있는 박상동 씨가 올해도 축시를 해 달라는 전화가 왔었다. 매년 같은 사람이 축시를 하면 싫증나지 않겠느냐고 하니, 마성 사람들은, 해맞이 축시는 으레 내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네 번째를 맞고 있는 고모산성 해맞이 행사에서 축시는 줄곧 내가 쓴 글로 낭독했다. 처음 두 해는 내가 울릉도에 살 때이기로 글을 써서 이메일로 보내면 집례자인 박상동 씨가 낭독을 했는데, 내가 육지로 나온 작년부터 직접 달려가서 낭독을 했다. 쓸 때마다 내용을 조금씩 바꾸어가긴 했지만, 마성이 번성하기를 비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겨우 두 해를 마성에 살았을 뿐이지만, 축시를 쓸 때마다 마성이 마치 예전부터 내 고향인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오정산 동쪽 한 자락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해맞이 행사를 시작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풍물놀이패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풍물이 어우러진다. 집례자가 읽는 홀기를 따라 헌관들이 차례로 나와 손을 씻고 좌정하여 좌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잔을 올린 후 재배로 소원을 빈다. 여상동 마성면장께서 초헌관으로 헌작례를 올리자 집례의 카랑한 독축 소리가 맹위를 부리는 추위를 밀어내며 퍼져나갔다.

"유세차 경인정월초일일 마성면장 여상동 감소고우 금위 마성면민 고모산성 신년하례 대한민국 국운융성 복지마성……"

날이 점점 밝아왔다. 정석화 마성청년특우회장의 아헌, 허영문 마성개발자문위원장의 종헌에 이어 나의 축시가 이어진다고 소개했다. 단 앞에 나섰다.

호랑이 기운차게 포효하는

희망찬 경인년 새 아침에

우리 고향 마성의 영원한 상징

고모산성 마루에 다시 우뚝 섰습니다.

(중략)

그 역사의 슬기가 어린 길 위에

명품 문경 사과 알알이 붉은 열매가,

국토 휘달릴 철도차량 만드는 망치소리가,

오정산 우람한 자락을 찬란히 수놓습니다.

(중략)

조령천 흘러 영강을 잇고

영강 흘러 낙동강을 이루듯

마성은 문경의 중심이 되어

문희경서, 그 찬란한 소식 위에 우뚝 섭니다.

일월성신, 천지신명이시여!

새 날 새 아침의 찬연한 밝음으로

품마다 포근한 사랑, 대문마다 넘치는 풍요로

우리의 마성을 빛나게 하소서, 해주소서.

(하략)

-빛나라, 마성이여!

문경사과연구소와 철도차량 제작 공장이 마성에 들어선 것을 발전의 기틀로 삼아 마성이 더욱 번성할 것을 축원하는 내용이다. 이 기관과 기업들이 모두 작년에 준공되어 새해부터는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한다. 마성의 발전과 복지를 위해서는 획기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점점 간곡해져 갔다. 마성은 내 제2막의 생애를 의탁할 땅이다. 어쩌면 생애의 최후를 다할 곳이 될지도 모른다. 마성의 좋은 일은 나의 기쁜 일이요, 마성이 빛나는 것은 내 삶의 빛을 더하는 것이다. 마성 사람들의 품마다 포근한 사랑이 깃들기를, 집집마다 풍요가 넘치기를 빈다고 할 때는 속 깊은 곳으로부터 선혈 빛 같은 간절한 심정이 솟아나왔다.

낭독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집례 박상동 씨는 마성 사람보다 마성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불원간 마성의 주민이 되기 위해 터까지 잡아 놓았다고 나를 한 번 더 소개한다. 해맞이 객들은 나를 향해 다시 박수를 보냈다.

저 건너 산자락 동쪽이 붉은 빛을 더해 갔다. 면장이 소축을 위해 불붙은 축문을 높이 들었다. 축문을 사른 불꽃이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드디어 붉은 알 하나가, 모든 생명의 씨를 다 담고 있을 듯한 찬연한 알 하나가 산허리에서 도렷한 얼굴을 조금씩 내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소리가 산성을 울렸다. 함성과 박수소리가 불꽃처럼 산성을 수놓을 때 해는 찬란한 햇살을 뿌리며 산자락 위로 우뚝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손을 모은다. 연신 허리를 굽힌다. 올 한 해, 무병으로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고, 사업이며 학업을 성취하게 해 달라고, 부자 되게 해 달라고, 행복하게 해 달라고……. 저마다의 간절한 소망을 모은다. 이한성 국회의원과 면장, 개발자문위원장의 덕담이 이어진다. 모두들 나라와 지역사회와 가정의 발전과 안녕과 번성을 빌고, 문경의 중심인 마성의 번영을 기원했다. 다른 지역을 다 두고 이 산골의 작은 마을을 찾아와 기원을 모아주는 국회의원님이 고맙다고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박수와 햇빛은 산성 마루 찬 기운을 성 아래 저 먼 곳으로 몰아내었다.

부면장이 나와서 만세를 선창했다. 국운 융성을 위하여, 문경 번성을 위하여, 마성 복지를 위하여, 만세!, 만세!, 만세!-.

제례가 끝난 제상 앞에 앉았다. 집사가 따라 주는 술잔을 상 위에 올리고 새날 새 해를 향해 절을 올렸다. 간직해 두었던 소원을 끄집어냈다.

"해님이시여! 올해는 꼭 손자 보게 해 주시고, 못고개마을에 잡아 놓은 집터에 아담한 집 하나 지어 마성 사람이 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 부부 함께 건강하게 살게 해주소서!"

너무 욕심스럽게 빈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간절한 나의 소망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소원 성취하세요!"

산골 작은 마을 마성의 해는 사람들의 소박하고도 커다란 소망을 안고 하늘 한가운데 자리를 향하여 천천히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무럭무럭 김이 나는 떡국 한 그릇씩을 들고 맛있게 먹는다. 그 따뜻한 기운이 가슴 속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새 날 새 해의 기운이 몸 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소망의 체온이 점점 열기를 더해 가는 풍물소리와 함께 달아오르고 있었다.♣(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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