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기도의 힘

이청산 2009. 7. 8. 09:54

기도의 힘



놀라운 일이다. 아내가 그토록 가파르고 높은 계단 길을 다 오르다니! 모두 사백 열아홉 층계나 되는 계단을 쉬지도 않고 올랐다. 허리도 좋지 않고 무릎도 성치 않으면서 가풀막에 갈지자로 솟아 올라가는 그 수많은 층계를 거친 숨 몰아쉬며 오르게 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선 것은 꼭두새벽이었다. 건강이 그다지 온전하지 못한 아내는 이번 나들이를 크게 내켜 하지 않았으나 일행의 권을 못 이겨 함께 나섰다. 6시 좀 넘어 일행이 집결해 있는 출발지에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네 쌍의 부부로 모두 여덟 명, 다른 삼십 여명의 관광객과 더불어 한 차를 타고 북쪽을 향하여 고속도로를 달려 나갔다. 추풍령휴게소에 잠시 내려 아침 식사를 하고 계속 길을 돋우었다.

4시간쯤을 내쳐 달려 첫 목적지로 당도한 곳이 백제의 고찰 수덕사다. 가요 노랫말처럼 '인적 없는 수덕사'가 아니라 절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한참을 올라갔다. 대웅전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세월의 더께가 창연히 내려앉아 있었다. 절 경내를 둘러보는데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종무소인 조인정사의 주련에 좋은 글귀가 있다기에 보고 싶었으나 보이지 않아 스님에게 물었더니, "나도 모릅니다. 그런 헛된 지식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님께 절이나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요."라고 했다. 공연히 식자연한 것 같아 무안하여 고개를 돌리니 아내가 대웅전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괜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에 아내는 부처님께 열심히 절을 올린 모양이었다.

절을 나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돋우었다. 길이가 오십 리도 넘는다는 바다 위의 거대한 다리 서해대교를 지나 인천으로 들었다. 시가지를 지나 한참을 달리니 김포라 했다. 김포톨게이트를 통과하여 강 같은 바다 위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니 강화도가 나타났다. 강화도 외포항에 발을 내린 것은 집을 나선 지 반 하루가 흘러 해가 수평선을 향해 내닫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내는 긴 시간 편치 않은 차의 자리를 의지해 온 허리가 더욱 욱신거린다고 했다.

항구에 대인 거대한 배에 사람과 차가 함께 탔다. 사람이 던지는 새우깡에 입맛을 들인 갈매기 떼들이 이방의 먼 나그네들이 반가운 듯 뱃전을 거침없이 날아든다. 배는 잠시 바다를 미끄러져 조그만 섬 석모도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차를 타고 이십 분을 달려 낙가산 기슭에 자리 잡은 보문사에 닿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는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 도량으로 알려진 절이다. 이 절은 천연 석굴에 안치된 불상과 더불어 마애관음좌상이 유명하다고 한다. 마애관음좌상은 보문사가 관음도량의 성지임을 잘 상징하여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는데, 절에서 1㎞ 정도 떨어진 산 중턱 가파른 비탈에 자리 잡고 있어 찾아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불상은 1928년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드러내기 위해 관음보살 32응신과 11면 화신을 상징하여 높이 32척에 너비 11척의 거상으로 새겼다고 한다.

그 거대한 불상의 모습도 궁금하거니와 바다와 어우러져 펼쳐지는 주변의 절경을 보고 싶어, 힘들다는 일행은 제쳐두고 김 선생과 함께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로 나 있는 계단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층계가 하도 많아 과연 몇 단이나 되는가 싶어 하나하나 헤아리며 오르는데, 저 아래서 아내의 '나도 가요!'하는 소리가 절규처럼 들려왔다. 마침 108단까지를 헤아렸을 때였다. 아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함께 오르는데 벌써 구슬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아내는 무리하지 말라는 만류도 아랑곳 않고 가파르게 나있는 층계를 잠시도 쉬지 않고 올랐다. 삼백 단을 넘고 사백 단도 넘었다. 숲과 어우러지며 펼쳐지는 푸른 바다 절경도 돌아보지 않고 한 단 한 단 힘주어 오르기만 했다.

드디어 마애좌상 앞에 이르렀다. 커다란 좌상은 깎아 세운 듯 편편하게 서 있는 너럭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마치 지붕처럼 가지런하게 돌출된 머리 위의 바위가 비바람으로부터 부처님을 지켜주고 있다. 부처님은 네 모난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을 받쳐 들고 연화좌대 위에 좌정하고 있다. 귀, 코, 입이며 얼굴 생김새가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신에서 부처님의 자비가 그윽이 풍겨나고 있는 것 같다. 미간의 백호와 함께 卍자가 새겨진 가슴이 덥석 안겨도 좋을 만큼 푸근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내는 불상을 향하여 손을 모으며 오체투지로 엎드렸다가 일어서기를 거듭한다. 온몸이 진득한 땀으로 흠씬 젖는다. 몇 배나 올렸을까. 108배에는 못 미친지 몰라도 수없이 절을 올린 후 고두례까지 마치고 부처님 앞을 물러났다. 절을 할 때의 아내는 평소 나를 향해 잔소리를 할 때의 애증이 범벅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세상사 모두 잊고 마음을 오직 간구에만 모으는 듯했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이 높고 가파른 계단을 어찌 오를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일주문을 지나 절을 향해 올라오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절집 처마 위로 햇살이 서기처럼 산봉우리를 비추는데, 그 햇살 끝에 부처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더라고 했다. 동공에 힘을 주어 자세히 보니 부처님의 모습이 확연했는데, 그 순간 꼭 올라가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무슨 계시처럼 뇌리에 꽂히더라고 했다. 무엇을 빌었느냐고 물으니 '한 가지만 빌었지요. 비밀이에요.'하고 입을 다문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내가 과연 무엇을 기도했을까. 물론 소원을 빌었겠지만, 아내의 소원이란 가족에게 관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부부에겐 두어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아들이 결혼한 지 여섯 해가 지나도록 손녀 하나밖에 얻지 못해 손자가 보고 싶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가족 모두 건강하게 사는 것이요, 그 다음 하나는 경치 좋고 공기 맑은 곳에 노후를 의탁할 작은 집을 하나 짓고 싶다는 것이다. 아내는 과연 무엇에 소원을 모았을까. 단 한 가지를 기도했다면 손자 보는 일에 마음을 모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얼굴은 흘러내린 땀에 씻겨 해맑은 홍조가 피어났다.

보문사를 내려와 석모도 석포항으로 왔다. 어느 식당에서 이곳의 특산물이라는 밴댕이 회를 안주 삼아 막걸리 몇 잔을 곁들여 저녁 식사를 하고, 들판 가운데 있는 어느 모텔에 들어 잠자리를 잡았다. 네 쌍의 부부가 남녀를 갈라 두 객실에서 잠을 청하는데, 아내는 오늘의 나들이가 너무 고단하여 끙끙 앓지나 않을까, 동숙객의 잠자리에 불편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밤사이의 안녕을 물었더니, 개운하게 잘 잤다고 했다. 허리도 다리도 별로 아프지 않더라고 했다. 다른 이들도 아내가 편안히 잘 자더라고 했다. 체력과 신체의 상태에 마련해선 과로를 하고서도 잘 잘 수 있었다니 다행이다. 힘 다 모아 소망을 빌었다는 만족감 혹은 위안감이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도는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는 힘도 있겠지만, 심신에 위안과 정화를 느끼게 하는 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수필가는 '기도의 힘은 오늘의 불협화음도 내일의 협화음으로 만든다. 어떠한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게 하며 변화와 회복을 가져온다.'고 했다. 아내가 마음을 모으려는 기도의 힘이 신체의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바꾸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가파르고 높은 계단도 너끈히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간절한 기도를 부처님이 들어 주실 것 같은 은근한 기대 속에 몸의 고단을 충분히 묻을 수 있었으리라. 아내가 마음을 모았던 그 기도가 아내에게, 우리 가족에게 즐거운 '변화와 회복'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튿날, 일행은 석모도를 떠나 강화도를 거쳐 인천으로 나왔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쯤 물살을 가르니 106년 만에 올해 처음 개방되었다는 팔미도에 닿았다. 인천항에서 삼십여 리 남쪽 해상에 있는 조그만 무인도다. 190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곳으로, 그 등대로 인해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유서를 간직하고 있다. 등대는 산봉우리 위에 높다랗게 서 있었다. 팍팍한 계단 길을 한참 걸어 올라야 했다. 아내는 이 길도 크게 힘들다 하지 않고 올랐다.

섬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200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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