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섬을 향해 간다

이청산 2009. 3. 31. 15:11

섬을 향해 간다



 섬의 봄이 바다를 건너왔다. 따뜻하고 향긋한 가슴을 싣고 왔다.

봄은 상자에 담긴 채 동해 바다 오백여 리 물길을 건너고 대여섯 시간 뭍길을 달려 내륙 깊숙한 곳으로 찾아왔다. 상자를 풀어 헤쳐 보니 섬의 봄나물이 한가득 그리고 '울릉도 호박엿' 한 봉지가 들어 있다. 울릉도 사람 ㅁ씨가 보낸 것이다. 그 나물들이 바로 섬이고, 섬의 봄이고, 섬의 향기다. 호박엿 한 봉지는 '울릉도'를 잊지 말라는 전언이리라.

'울릉도'라는 소리만 내도 곧 바로 그 나물 이파리들이 떠오른다. 화산암이 기이하게 솟은 섬의 산 모습만 그려보아도 얼른 머리 속을 감도는 것은 그 나물이고, 청옥빛 푸른 섬의 바다를 상상해도 먼저 섬의 그 나물이 파도에 실려 오는 것만 같다.

ㅁ씨가 바로 섬의 그 나물이요, 섬이요, 바다인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섬에 사는 여인'이라 하고, 블로그의 닉네임을 '동해바다'라고 했다. 섬이 좋고 바다가 좋다는 말이다. 섬을 사랑하고 바다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녀에게서 섬은 절해고도가 아닌 생활의 아름다운 터전이요, 안식처요, 자랑삼는 삶의 보람이다.

ㅁ씨는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ㅁ씨가 사진으로 찍는 것은 딱 두 가지, 섬의 풍경과 풀꽃이다. 바다와 어우러진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빚어내는 고혹적인 풍경들, 그리고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항구와 바다의 서정적인 풍경들이 그녀의 카메라에 담긴다. 또한 그녀의 카메라는 섬에만 있는 매혹적인 풀꽃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ㅁ씨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ㅁ씨가 쓰는 글의 소재는 모두가 사진의 소재와 같다. 역시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풀꽃에 관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만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움과 그 감동을 시의 형식으로 혹은 수필의 그릇에 담아낸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사이에 ㅁ씨는 스스로 섬의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풀꽃이 되어 간다. 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섬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살기에 마음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ㅁ씨의 마음과 섬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한 몸체다.

명이며, 전호며 부지깽이 같은 섬 나물에는 다른 어느 곳의 어떤 나물에서도 느낄 수 없는 향기가 난다. 풋풋하고, 알싸하고, 산뜻하고, 담박하고……. 하나로 잘라 드러낼 수 없는, 오감을 정겹게 자극하는 은근하고도 깊은 향기다. 그 향기가 ㅁ씨에게서 풍긴다. ㅁ씨가 바로 섬의 향기로운 풀꽃이기 때문이다.

섬을 떠나온 것은 지난해, 여름이 꼬리를 접어갈 무렵이었다. 뭍의 가을이 가고, 겨울도 지나 봄을 맞았다. 나의 섬살이는 기억 속의 한 자리로 들어앉았다. 섬을 향한 그리움도 아쉬움도 이제는 기억의 한 장으로만 머물게 되었다.

수 년 전 첫 섬살이의 감동과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 다시 섬을 찾은 것은 이태 전이었다. 섬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첫사랑의 섬은 아니었다. 첫사랑은 가슴속에 묻어둘 때가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섬보다 가슴속의 섬이 더욱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 번째의 섬을 살았다.

그래도 다시 찾은 섬에서 한 해 반을 살면서 잊지 못할 추억 하나 장만했다. '울릉문학회'와의 만남이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풍광 속을 살고 있 는 섬사람들에게 문학적인 감동인들 어찌 없으랴. 감동의 가슴을 가진 섬사람들을 모았다. 그 아름다움과 감동을 글로 한번 풀어내어 보자며 문학회를 만들었다. 섬살이 한 해 뒤에 동인들 함께 뜻을 모아 '울릉문학'지를 펴냈다. 그리고 가을의 들머리에서 섬을 떠나왔다.

그 때 만난 사람이 섬의 나물 같은, 바다 같은, 섬 같은 ㅁ씨였다. 우리는 늘 그의 집에 모여서 쓴 글들을 함께 읽고, 섬살이를 이야기하고, 섬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일백 이십여 년 전 배를 저어와 섬을 일구었던 개척민의 심정으로 섬의 문학을 심어 보자 했다. 그를 비롯한 몇 사람과 함께 울릉 문학의 터를 닦았다. 내가 섬을 떠나던 날, 차마 부두에 나올 수 없었다며 문자 메시지만 보냈었다.

그리고 뭍의 이 봄에 그는 섬의 봄을 보내왔다. 섬의 향기를 담뿍 보냈다. 그 봄을 펼치는 순간 그것은 섬의 나물이 아니라 바로 그였고 섬이었다. 지난 섬살이가 파노라마로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섬살이가 아린 상처처럼, 애련의 사랑처럼 살며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슴 한 지리에서 핏빛 동백꽃 송이 하나가 피어났다.

지금 섬은 동백꽃이 한창일 터이다. 역시 잊지 못할 곳이다. 섬을 사랑하는 ㅁ씨가 있고, 향기로운 봄이 있는 그 섬은 내 안에서 영원할 곳이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수도 없는 사념의 그 섬은 영원히 찾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섬을 찾아 바다 건너기란 곧 삶이 아니던가. 섬은 그 지표가 아니던가.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찾아가야 할 곳이 아니던가.

그 섬을 향해 간다. 그리운 삶을 찾아간다.♣(200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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