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그림자 여인

이청산 2009. 3. 14. 10:50

그림자 여인



 보퉁이를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아내는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기다란 몸체를 서서히 움직여 나갔다. 마치 긴 이별이라도 하듯 서로 손을 흔들었다. 아내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 열차가 시계를 벗어날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역을 빠져 나와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사람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차를 오르내렸다. 집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낯선 공기가 가슴에 확 안겨 왔다. 거실이며 부엌이 전에 없이 넓고 커 보였다. 천장의 전등에서는 부연 불빛이 안개처럼 번져 나왔다.

서울 사는 딸이 어미에게 외손녀를 당분간 좀 봐달라고 했다. 육아 휴직 기간이 끝나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데,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뒤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늙은 아비의 불편은 생각해 주지 않는 것 같아 좀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린것 생각하면 딱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죽하면 그런 부탁을 하겠느냐며, 한번만 들어주자고 아내가 사정했다.

늙어 갈수록 자식에게 기울어지는 어미의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내의 호소(?)를 모른 체할 수도 없고, 딸의 형편을 도외시할 수도 없어 그리하라고 했지만, 마음은 별로 가볍지 못했다. 딸은 아비 사정을 생각하여 시어머니에게도 번갈아 가며 제 아이 돌봐 주기를 부탁하겠다고 했다. 당분간은 나 혼자 지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내는 떠나고 날이 저물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밥도 지어 놓고 반찬도 냉장고에 채워 놓았지만, 차려 먹을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밥통의 밥이 거덜 나면 직접 쌀을 씻어 밥을 지어야 하고, 국이 떨어지면 무얼 무얼 넣고 끓여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기까지 했다.

아내와 나는 떨어져 생활해 본 적이 없다. 하루 이틀쯤은 아내가 어딜 다녀오기도 하고, 내가 며칠씩 나들이를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도 끽착 마련을 걱정해 본 일은 없다. '홀로 서기'를 해 본 일 없고, 해 보지 않았으니 단련될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오는 사이에 나에게서의 '홀로 서기' 기능은 퇴화해 버리고 말았다.

밥솥에 밥을 푸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에 차리다 말고 아내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보고 싶어졌다. 사랑 때문일까, 필요 때문일까. 사랑일 것도 같고 필요일 것도 같았지만, 사랑해서 필요하다기보다는 필요해서 느껴지는 사랑인 것 같아 아내에게 살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을 키우고 바라지를 해올 때까지 임지는 옮겨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 큰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다들 집을 떠나가고 아내와 나만 남게 되었다. 쌓이는 연륜과 더불어 내가 수행해야 일이 달라지면서 일터를 따라 타방을 전전해야 했다. 아내도 나를 따라 다니며 객지의 거소를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어찌하다보니 자동차의 운전도 아내의 몫이 되었다. 아내와 나는 함께 움직여야 할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시간의 많은 부분을 나에게 주어야만 하는 아내는 스스로를 일컬어 '그림자 여인'이라 했다. 나의 그림자와 같다는 말이다. 그 말은 나를 위한 희생의 이름이기도 했고, 신세를 한탄하는 탄사 같기도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내 희망이 뭔지 알우?"

"……?"

"어서 정년이 되어 당신이 퇴임하는 거-."

"뭐라고?"

"그 때라야 내가 '그림자 여인'에서 벗어날 게 아니우?"

아내의 희망은 소박하고도 간곡했다. '그 때'가 되면 자기도 사방팔방 구경도 좀 다니고 취미생활도 할 것이라 했다. '그 때'는 밥도 같이 짓고, 청소도 함께 하고, 텃밭도 힘 모아 가꾸자고 했다. 지금은 나의 '큰일'을 위해 아무 소리 않고 할 일 하고 있다고 했다. 아내판 독립 선언이라 할까. 가슴속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주부 휴가를 선언하고 가출을 해버리는 어느 드라마의 극중 인물이 떠올랐다.

그 동안 아내의 삶이 어지간히 고단했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 아내 스스로의 삶이란 별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애의 대부분을 가족들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그 덕분에 나는 일터에 나가 해야 할 일들을 별 걱정 없이 할 수 있었다. 결국 내 일터의 일들도 나 혼자 해낸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해낸 셈이다. 나의 일이 끝나고 나면 아내의 일을 나누어하자는 데 마다할 수 없고, 회피할 언턱거리도 없을 것 같다.

아내 없는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고 그릇을 씻으려니 손이 설다. 나의 덩둘한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지금까지 아내에게 나의 그림자 노릇만 시킨 탓이다. 내 일터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나도 그림자 되기 연습을 해야 할까 보다. 서로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애를 써야 할 일이다.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일이다.

며칠째 본체와 떨어져 있는 '그림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2009.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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