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덤의 행복

이청산 2009. 2. 17. 21:01

덤의 행복



 아무리 찾아도 없다. 책꽂이 칸마다 다 뒤져보고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 봐도 흔적조차 알 길 없다. 며칠을 두고 찾았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머리 속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기억들을 간추려 보면 책장 어디쯤 꽂혀 있을 법도 한데 막상 뒤져보면 없다. 여간 안타깝지 않다. 정리벽이 없고 일에 덩둘한 것을 아무리 탓해봐도 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보건세계」, 대한결핵협회에서 '건강한 몸·건강한 마음·건강한 미래'라는 기치 아래  매월 펴내는 사보다. 육십여 쪽의 두께로 2만5천 부를 발행하여 전국의 기관 및 사회복지 시설에 배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책 2005년 1월호에 나의 수필 '겨울이 오다'가 권두의 '생각의 窓'이라는 코너에 실렸었다. 협회 홍보과 박연숙 기자의 청탁으로 싣게 된 글이다.

글이 너무 멋지게 실렸었다. 머리에는 글 내용에 잘 어울리는 겨울 풍경이 펼쳐지고, 한 장을 넘기면 '계절은 빈 가지로부터 와서 빈 가지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발췌문과 함께 눈밭에 앙상한 가지 하나 서 있는 칼라 삽화를 전면에 걸쳐 글에 어울리게 장식해 놓았다. 글들을 여러 지면에 숱하게 발표해 오던 가운데서 그렇게 멋진 편집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멋진 편집에 글이 따라 가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 멋지고 아름답게 편집된 내 글을 기념 삼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잘 없어지지 않을 어느 자리에 깊숙이 보관했던 것 같다. 그 귀한 것을 아무렇게나 건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인사 이동을 따라 몇 차례 삶의 터를 옮겨 다니는 사이에 그 책에 대한 생각을 잠시 놓았던가 보았다. 사랑도 너무 깊어지면 병통이 되듯이 너무 깊이 간직해 둔 것이 탈이 된 것 같다.

날이 갈수록 흐려지는 기억을 탓해봐도 소용없다. 부피가 얇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 어딘가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자위해 보지만,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 예쁜 편집이 다시 눈앞에 선연히 다가온다. 문득, 박 기자로부터 청탁 받은 메일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메일을 검색해보니, 몇 년 전의 것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책을 찾은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이렇게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랴.

협회로 전화를 걸었다. "박연숙입니다."라는 말이 전파를 타고 오는 순간 심장의 박동이 잦아지는 듯했다. 여태껏 그 자리를 지켜주신 게 참 고마웠다. 수년 전의 기고자임을 밝히고 책을 읽어버려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정을 말했다. 한 권 구해 볼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과년 호는 일 년치씩 합본하여 보관하고 있고 여분은 없노라고 했다. 절망의 옅은 그림자가 사르르 내려앉았다.

"구해 볼 길이 전혀 없겠습니까?……" 내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찾아보고요, 있으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락처 좀……. 오늘 중으로 연락 드릴게요."

해가 기울어 갈 무렵 박 기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주소를 불러 주세요. 보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하늘빛이 맑고 고운 자줏빛으로 바뀌어 갔다.

책을 기다린 지 사흘째, 소포 뭉치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처는 '대한결핵협회', 분명히 책일 터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껍담?

책은 뜻밖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2005년도 한 해치 열두 권을 한 데 묶어 두꺼운 표지로 제본한 것이었다. 내가 찾는 책의 낱권이 없으니 합본을 보낸 것이다. 내 글이 실린 2005년 1월호를 필두로 하여 12월호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박 기자에게 고맙다고 전화했더니 앞으로 매월 발행되는 책도 계속 보내 주겠다고 했다. 거듭 고마운 일이다.

덤의 행복이었다. 책을 못 찾아 안타까운 마음에 마련하면 내 글을 다시 찾아 읽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여간한 다행이 아닌데, 남의 좋은 글을 더불어 읽게 되니 '다행'은 어느새 '행복'으로 바뀌어 간다. 결핵과 건강 생활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글들도 꼭 알아두어야 할 소중한 정보지만, 시인이며 작가, 화가며 여행가 등 여러 방면의 기고가들이 쓴, 마음을 아름답게 다스릴 수 있는 감동적인 글들도 많다.

'바람에 한쪽으로 기운 포플러와 자갈, 그리고 구름이 들어 있는' 그림을 즐겨 그리던 삼촌이 결핵을 앓다가 이승을 떠나버리자, '삼촌을 사랑하던 처녀는 시집을 가지 않고 고아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는 박동규 교수의 글 '한여름 포플러 나무 그늘 아래서'는 그 아릿하고도 따뜻한 사랑이 코끝을 시리게 한다. '작은 즐거움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그게 바로 행복을 가꾸는 일'이라는 송종호 동화작가의 동화 '행복의 씨앗'은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감동은 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편집이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을 신선한 아름다움에 젖게 해준다. 그 편집의 주인공 박 기자는 그의 글 '텍스트를 넘어선 예술로서의 책 BOOK ART'에서 말한 것처럼 '책에 미와 정성과 장인의 숨결을 불어넣는' 이 시대의 뛰어난 북아티스트라 할 만하다.

두툼한 두께로 합본된 책이 나에게는 아늑한 안도감을 안겨준다. 졸작의 글이지만 아름다운 편집으로 꾸며 실린 내 글을 이제는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넉넉한 두께를 어찌 잃거나 잊을 수 있으랴. 기억의 심연에 아무리 깊이 묻힌들 그 책은 언제나 내 곁에, 내 눈앞에 있을 것이다.

책을 볼 때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한 사람의 후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의 제목만 보는 것으로도 따스한 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진다. 그 덤의 행복을 느끼며 합본「보건 세계」를 다시 편다.  나, 우리의 건강한 몸, 건강한 마음, 건강한 미래가 살며시 보이는 듯하다.♣(200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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