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삶·단상(斷想)Ⅱ

이청산 2009. 1. 14. 17:12

삶·단상(斷想)Ⅱ



삶·7-늙음

 

회갑이 지났다. 옛날에 어른들이 회갑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서는 '사람이 늙으면 회갑을 맞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막상 회갑을 맞고 보니 그 생각이 정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내 자신이 늙어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기 때문이다. '늙음'이라는 것은 삶의 경륜이 많이 쌓였다는 말이다. 삶에 대한 생각도, 세상을 보는 눈도 깊어지고 넓어져 있다는 말이다. 산전수전 겪어온 삶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틀 같은 것이 정립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름대로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다. 아직도 모든 일에 서툴기만 하고 어둔하기만 하다. 세상살이에 별 혜안 같은 것도 없다. 그러니 내가 어찌 '늙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랴.

기를 쓰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른다. 퇴근 후면 언제나 오르는 산이다. 가풀막이 심해 힘은 들지만, 그래서 땀을 많이 흘릴 수 있어 좋다. 토요일 오후라 좀 일찍 그 가풀막을 올랐다. 얼굴이며 몸이 흥건한 땀에 젖었다. 산정에 있는 정자에서 중년의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산아래 펼쳐지는 시가지 풍경을 조망하며 놀고 있었다.

"거기로도 길이 있습니까?"

길이 없을 것 같은 가파른 등성이를 타고 오른 것이 신기한 듯 남자가 물었다.

"좀 힘들지만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지요."

잠시, 남이 하지 못한 일을 성취해 낸 것 같은 뿌듯함에 젖었다.

"예야! 이것 할아버지 갖다 드려"

여자가 아이에게 귤 두 개를 내밀었다. 주위를 둘러 봐도 할아버지는 없었다.

"할아버지, 이것 드세요."

아이가 나에게 귤을 내밀었다.

"……?!" (2008.12.5)

 

 

삶·8-이외수의 삶

 

작가 이외수가 '이외수 생존법'이라는 이름을 걸고 '하악하악'이라는 책을 내었다.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나름대로의 도통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책 속에는 소제목으로 쓴 '털썩', '쩐다', '대략난감', '캐안습', '즐!'을 비롯하여 '아놔', '홈조무', '듣보잡', '개쉐야', '킹왕짱', '조낸', '넷좀', '슈레기', '깬다', '졸라', '언넘', '우쒸', '퍽' 등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장난삼아 쓰는 말들투성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악풀에나 있을 법한,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들을 여상스럽게 쓰고 있다. 그런 말들이 작가인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생각하며 그런 책을 썼을까.

나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보아서 그랬는지, 그의 이야기 가운데에는 "모른다는 사실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 비판이나 비방을 일삼지 말라, 그것은 무지라는 이름의 도끼를 휘둘러 남의 뒤통수를 찍으려다 자신의 이마를 쪼개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라고 못을 박듯 갈파하는 말도 있다. 그런 말 해놓고 자신도 쑥스러운지 '나무관세음보살'을 덧붙여 놓았다.

보도를 보니, 하루 8갑씩 담배를 피우는 골초로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을 얻어 몸 상태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그가 어느 날 담배를 뚝 끊어 건강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방송에 출연도 많이 하여 돈도 벌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건 참 잘 된 일이다. 독자들에게 '하악하악'을 읽으라 하기보다는 금연 성공 사례를 들려주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 (2008.12.15)

 

 

삶·9-건강

 

가끔 몇 살까지 살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 때마다 나는, 하루를 살아도 좋으니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나는 이 세상과 맺어져 있는 인연의 끈을 언제 놓더라도 걸릴 게 별로 없다. 부모님은 먼저 저 세상에 가 가 계시고, 아이들은 제 살 방도들을 찾아 제가끔 살고 있으니 내가 치다꺼리를 해야 할 일이란 별로 없다. 물론 아들이나 아내가 가슴을 조금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일이야 언제 겪어도 겪어야 할 일 아닌가.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고 또한 가족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이야말로 건강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이라야 부지런히 걷는 것이지만, 운동 중에서도 걷는 운동이 제일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굳게 믿고 있다. 그 운동 덕분인지 아직까지는 별 시원찮은 곳 없이 몸 가볍게 지내고 있다. 이렇게 살다가 보면 수명도 늘려가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천래적인 것도 있고, 섭생의 문제도 있어 혈당과 혈압의 수치가 가끔씩 높아질 때가 있는 것이 내 건강의 흠이라면 흠이다. 체질에 맞지 않거나 해로운 음식물은 가려서 먹으려고 애를 쓰며 섭생에도 유의하고 있지만, 단 한가지 매정해질 수 없는 것이 술이다. 술이 혈당이나 혈압에 좋을 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가끔씩의 모주에서 느끼는 정신적 위안을 외면할 수가 없다. 신체 건강을 알뜰히 챙기려고 마음 건강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술을 즐길 수 있는 건강을 얻으려 함에도 까닭이 없지 않다. 어찌하였던 나는 심신 모두 병치레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장수는 그 다음의 문제다.(2008.12.21)

 

 

삶·10-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어느 날 다윗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반지 하나를 만들라. 거기에 내가 크게 승리하여 기쁨에 들떠 있을 때 겸손을 생각할 수 있고,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다시 기운을 북돋울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고 명령을 내렸다. 보석 세공인은 적절한 글귀를 찾지 못해 고민하다가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솔로몬 왕자는 "그 반지에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라고 새겨 넣으시오. 왕이 승리감에 도취해 자만할 때, 또는 패배해서 낙심했을 때 그 글귀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어찌 다윗왕의 삶에서 만이랴. 누구의 삶에도 영원한 것이란 없다. 미움도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오욕도 영광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흐르는 시간을 따라 지나가기 마련이다.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일과 가슴에 안고 싶은 일로 반전을 거듭했던 내 회갑의 해 무자년이 지나가고 있다. 새해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올까. 어떤 모습이든 그도 또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에 번민 속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질곡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이 겨울 지나고 나면 따사로운 봄이 오듯이-.(2008.12.28)

 

 

삶·11-세월의 쓸쓸함

 

내 지나온 생애가 비로소 돌아 보였다. 연구회 모임에 갔었다. 연구회가 발족된 것은 지금부터 19년 전쯤이다. 발족된 지 6년 뒤에 내가 4대 회장을 맡아 회를 운영하다가 물려주고, 그렇게 하여 10대째 회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랬지만, 올해에도 낯선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젊은 회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수회 행사가 끝나고 자기 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앞으로 나가서 회원들을 향해 자신을 소개하는데, 문득 콧마루가 시큰해 왔다.

자리 어디를 봐도 나보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고 보니 초창기 연구회를 일굴 때부터 함께 일했던 선배들은 모두 교직 생애를 마감하고 떠나버렸다. 황량한 벌판에 혼자만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월이란 참 쓸쓸한 것이라는 생각이 가슴속을 후비고 든다. 회원들을 향해 말했다.

"…… 지금 보니 연구회를 함께 해 왔던 선배님들은 다 떠나셨군요. 한 일 없이 세월만 써 버린 것 같아 착잡하기도 하고 쓸쓸한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젊은 여러 회원 님들을 보니 회의 앞날을 위하여 기쁘고도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이제 저는 이 회에 참석할 기회도 별로 남지 않았군요. 그러나 언제라도 불러만 주신다면 기꺼이 달려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소나기 같은 박수소리가 장내를 매웠지만, 소리는 이내 나에게서 한 움큼의 시간을 빼내어 회의장 문 밖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200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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