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승윤이의 노래

이청산 2008. 12. 16. 12:07

승윤이의 노래



승윤이에게 나이를 물으면 손가락 셋을 펴면서 '세,살!'이라고 또렷하게 말한다. 태어난 지 두 해에 서너 달이 더 지났으니 세 살은 맞다.

주말을 맞아 모처럼 제 아비, 어미와 함께 할아비, 할미를 찾아왔다. 아비, 어미가 절을 하니 저도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몇 달을 못 봐도 할아비, 할미 생각은 잊지 않았다. '승윤아!'하고 팔을 벌리니 저도 팔을 벌리며 덥석 안긴다. 꼭 껴안으니 저도 팔에 힘을 넣어 꼭 껴안으며 '할아버지 사랑해요!'한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말이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자랐다. '할아버지도 승윤이 너무 사랑해.'하니 쪽! 소리나게 볼에다 뽀뽀를 한다. 말도 제법 잘하고 제가 하는 말속에 담긴 뜻도 제법 아는 것 같다.

"승윤아!"

"네!" 대답 소리도 씩씩하다.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래!"

"아빠, 엄마는요?"

"아빠 엄마는 서울 가고."

"……"

그 밝고 씩씩하던 얼굴에 갑자기 옅은 그늘이 진다.

어린것은 어린것이다. 어찌 제 아비, 어미를 떨어지겠다 할 수 있으랴.

"아냐, 아냐. 할아버지 할머니는 승윤이 이렇게 만나면 돼! 승윤이 참 예쁘기도 해라."

입가에 다시 미소가 돌면서 짝짝! 손뼉을 친다.

"승윤이 노래 한번 불러 볼래? 할아버지, 할머니께 들려 드려봐." 제 어미가 시킨다.

인형을 안은 채 앞으로 나가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자알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제법 멜로디도 안다. 높은 곳은 높이고 낮은 곳은 낮춘다.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는 이 한 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아가를 잘 자라고 할 때에는 인형을 토닥이며 제 볼을 인형에다 갖다 댄다.

"아이구! 참 잘하네"

관객이 된 두 부모는 감동의 아낌없는 박수를 친다.

신이 난 승윤이는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고∼'하며 '섬 집 아기'도 부르고 '에이비씨디 이에프지-'하고 알파벳 노래도 소리 높여 부른다.

"아유! 예뻐라." 하나하나 하는 품이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승윤이 참 명랑하고 씩씩하구나. 잘 한번 키워 보자구나." 승윤이의 볼을 만지며 며느리를 보고 말했다.

"네,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며느리가 수줍게 말하자 아들이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다며 거든다. 특히 책을 많이 읽어주고 있다고 했다.

"좋은 일이다."

"그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지."

며느리에게 마련해 놓은 선물을 주었다. 아이를 영재로 키운 부모의 수기를 담은 책이었다. 아이를 영재가 되게 하는 것은 독서교육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책이다. 엄마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누구나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밝고 환하게 크면서 책도 잘 읽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승윤이의 재롱을 보는 즐거움에 젖으며,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를 두고 담소하는 사이에 승윤이와 해후의 밤이 새록새록 깊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모처럼 가족 사진 한번 찍자며 사진관으로 갔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번 찍은 적이 있었던가. 아들, 며느리와 어울려 승윤이와 함께 찍기는 물론 처음이다. 모처럼 할아비, 할미를 보러 왔을 때 온 가족 함께 하는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다. 승윤이를 안고 아내와 나란히 앉고 아들과 며느리는 뒤에 섰다. 좋은 장면을 얻기 위해 수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데도 승윤이는 잘 견뎌내었다. 저를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짓는 사진사를 보고 깔깔 웃기도 했다. 불을 번쩍이는 카메라 속으로 따뜻한 가슴들이 빨려 들어갔다.

승윤이가 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간다. 아내는, 서울에서는 잘 볼 수 없을 거라며 집 부근의 산으로 낙엽을 밟으러 가자고 했다. 산에는 갈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맨살을 활짝 드러낸 참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낙엽 되어 떨어진 참나무 넓은 잎들이 온 산을 덮고 있다. 승윤이는 보스락 보스락 밟히는 소리가 신기한 듯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할미는 낙엽을 한 움큼 잡고 흩뿌려 날렸다. 승윤이는 노래를 불렀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 나는 낙엽이 나비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모두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해가 넘어가려 했다. 낙엽 속에서 더 놀고 싶어하는 승윤이를 달래가며 산을 내려왔다.

역으로 데려가서 제 아비, 어미와 함께 내려주었다. 작별의 뽀뽀를 하고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안녕! 잘 가거라, 나중에 또 오고-."

어서 역으로 들어가라 하고, 흔드는 손을 뒤로한 채 집을 향해 달려나갔다.

거리에는 가로등 불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집에 다 와 갈 때까지도 아내와 나는 말이 없었다.

승윤이의 노랫소리가 귓바퀴 속으로 아릿하게 젖어들고 있었다.♣(200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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