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주지봉 연가

이청산 2009. 1. 14. 17:11

주지봉 연가



기축년 새해 첫날, 고모산성에서 해맞이 행사를 끝낸 우리들은 주지봉을 향하여 달려갔다. 못고개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내가 늘 오르던 등산로지만, 모곡리의 양어장이 있는 곳으로부터 오르기로 했다. 이태 전 빗돌을 지고 끌고 오르던 지난날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날은 12월 30일, 해가 바뀌는 날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그 날까지 나는 주지봉에 꼭 300회를 올랐다. 300회가 가까워 올 무렵, 마성 동네 산의 대표적인 산정이라 할 주지봉을 그리 자주 오른 것은 예삿일이 아니라며 기념 빗돌이라도 하나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성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마성에 사는 두 해 동안 참 부지런히도 주지봉을 올랐다. 퇴근 후의 시간을 마성에 머무는 날이면 비바람, 눈보라를 가리지 않고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건강을 돕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주지봉에 오르면 마성의 평화로운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처음에는 건강을 생각해 오르다가 차츰 미성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옮겨가면서, 하루라도 오르지 않으면 그립고 서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게까지 되어갔다. 주지봉은 해발 367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아늑하고 정겨운 마성의 모든 모습을 거느리고 있었다. '朱芝峰'이라는 고운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 새긴 표지판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마성을 사는 사이에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일터와 관계하여 만난 사람, 동네를 함께 살면서 만난 사람, 주지봉을 오르다가 만난 사람……. 그들은 한결같이 순박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성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이웃들이었다. 내가 '朱芝峰' 표지석을 세우고 싶다 했을 때, 그들은 '300회 등정 기념'을 새겨서 세우자며 뜻을 모아갔다. 조경업을 하는 김현수 사장이 돌을 구하여 글자를 새겨 왔다. 다른 사람들은 울력을 해서 산정에 빗돌을 세우기로 했다.

300회를 돌파하는 날, 주지봉 뒤쪽에 있는 정대모 씨의 양어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 뒷길을 택하여 오르기로 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시린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할 무렵임에도 봄날처럼 따뜻하고 화창했다. 손수레를 끌고 미는 사람, 삽과 괭이를 맨 사람, 물통을 든 사람, 시멘트 포대를 진 사람……. 나는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시루떡 한 뭉치를 들고 그들을 따랐다. 빗돌을 실은 수레를 끌고 밀면서 산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두어 시간을 빗돌과 씨름한 끝에 마침내 산정에 올랐다. 봉우리에 오른 사람들의 온몸은 땀으로 흠씬 젖고, 산 아래 벌판에는 따뜻한 햇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곡절을 다한 끝에 산정 제일 우뚝한 곳에 빗돌을 세웠다. 앞면엔 '朱芝峰'이라 커다랗게 새기고, 뒷면엔 '三百回登頂紀念 二千六年十二月三十日', 그리고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이 든 것이 좀 쑥스럽다 했더니, 사람들은 '그만큼 올랐으면 주지봉 주인이라 한들 누가 뭐라겠느냐?'며 웃었다. 마성과 주지봉에 대한 내 사랑의 실명 고백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빗돌 앞에 떡과 과일을 차리고 빗돌 앞에 모두 엎드렸다. '주지봉 더욱 아름답게 해 주시고, 마성 더욱 평화롭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 주십사'고 산신령께 빌었다. 그리고 모두들 두 팔을 들어 올리고 목청을 모아 '주지봉 만세!, 마성 만세!'를 외쳤다.

"야, 그 날 돌이 얼마나 무겁던지-"

"그래도 날씨가 얼마나 좋았어? 하늘이 도우신 거야."

"이렇게 안 세웠으면 주지봉 이름도 못 지닐 뻔했잖아."

"이리 덩그렇게 세워 주시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다 우리 고향 위한 일인 걸요, 뭐"

모두들 빗돌을 세우던 그 날의 회상에 젖었다. 그 날 울력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빗돌을 껴안고 쓰다듬으며 사진을 찍었다. 저 멀리 주흘산 봉우리에 구름이 벗겨지면서 아리따운 처녀가 누워 있는 듯한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정산 아래 샘골이며 오리골 마을에는 맑고 투명한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천 벌판의 박상동 씨의 한과공장 하얀 집이 밝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자! 우리 그 날 만세, 다시 한번 부릅시다."

"주지봉 만세! 마성 만세!"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고는 모두 손뼉을 모아 박수를 쳤다.

오늘 우리들이 주지봉에 오른 것은 주지봉과 마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내가 새해 새벽을 달려와 고모산성의 '마성 해맞이' 행사에 참여하여 축시를 낭독해 준 것에 대한 환영의 표시라기도 했다. 마성 사람들의 사람 사랑, 그 감동이 밀물처럼 가슴 깊은 곳으로 잔잔히 밀려왔다.

이들과 함께 한 잔의 술이라도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포근한 낙엽에 미끄러지기를 거듭하고 산을 내려갔다. 진남교반 맛좋은 매운탕집으로 가서 소주잔이라도 나누자고 이들의 소매를 잡았다. 산 아래로 내려 왔을 때, 정대모 씨의 양어장에서 이미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양어장 물고기들이 안주가 되어 술상에 앉았다. 새해 첫날의 해가 인정과 사랑의 술잔 속으로 저물어갔다.

"새해 첫날이 이리 즐겁게 시작되는 걸 보니 한 해가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즐거운 정도가 아니고 이 건 감동 그 자체네요."

"올해 모두 운수대통하고 건강합시다."

"마성의 발전과 우리 모두의 화합과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창 밖 하늘에는 새해 첫날의 새 별들이 하나 둘 또렷한 빛을 내어가기 시작했다.♣(20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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