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삶·단상(斷想)Ⅰ

이청산 2008. 12. 5. 12:08

삶·단상(斷想)Ⅰ



삶·1-광고지

 

빌라 출입구의 대리석 문설주며 처마 밑에는 온통 테이프 자국투성이다. 접착테이프로 광고지를 붙였던 자리다. 떼어내면 또 붙이고, 붙이면 또 떼어내는 숨가쁜 숨바꼭질이 벌어지고 있다. 멋지고 예쁜 방, 살기에 편하고 좋은 방을 싼값에 임대해 준다느니, 원하는 조건에 맞추어 계약해 준다느니, 주인 직접 거래하기 때문에 수수료가 없다느니 하는 방 임대 광고가 대부분이다. 광고지를 붙이면 엄중 문책하겠다는 경고문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경고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고 나면 광고지들이 문 앞에서 팔락거린다. 떼어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떼어내면 접착테이프와 테이프에 붙은 종이 자국만 흉하게 남는다.

대규모 공단이 가까운 곳이라 방이 필요한 사람도 많아 임대업이 성업을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광고지가 이렇게 남발되고 있는 것을 보니 수요보다는 공급이 더 넘치는 모양이다. 요즈음의 경제 불황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불황의 경제가 마음도 불황으로 만드는 것일까. 말짱한 남의 집 문설주에 반갑지 않은 광고지를 덕지덕지 붙이는 사람의 염치도 큰 불황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얼룩 자국을 깨끗하게 닦아 놓으면 덜 붙일까 하여 말끔하게 긁고 닦아 놓아도 어느 샌가 막무가내로 또 붙여 놓는다. 붙이고 떼는 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불황의 끝은 어디이고 몰염치의 끝은 또 어디일까.

 

 

삶·2-왼손잡이

 

나는 왼손잡이다. 에드 라이트의 '왼손이 만든 역사'를 읽고 왼손잡이의 특징을 알았다. 일찍이 이집트의 람세스 대왕으로부터 잔다르크, 나폴레옹, 헨리 포드, 찰리 채플린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빌 게이츠와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움직여 온 많은 사람들이 왼손잡이였는데, 이들에게는 직관력과 감정이입 능력, 시각·공간적 능력이 강하고, 수평사고로 인습을 타파하려 하며, 고독한 성격에 독학으로 뜻을 이루려 하고, 실험정신이 강한 공상가들이 많고, 그리고 화를 잘 내는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들이 가진 긍정적인 능력에는 하나도 따라 갈 수 있는 게 없고, 다만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조금 닮은 것 같다. 속이 상한 일이 있으면 참고 삭힐 때도 있었지만, 가끔씩 화도 잘 내었던 것 같다. 역사를 움직인 왼손잡이들은 유치한 성내기부터 냉혹한 전장의 분노에 이르기까지 분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나는 주로 조그만 일상사의 유치한 성내기로 남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 같다.

마음의 수련이 덜 된 탓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화를 내었던 뒤끝에 다행하고 유쾌한 일이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더욱 속상해지고 더욱 고독해졌을 뿐이다. 화를 자제할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가슴 깊숙이로 파고든다. 한 권의 책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왕왕 있지만, 이 책이 앞으로의 내 삶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 되기를 바라면서 애쓰고 싶다. 이순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살아도 배우고 익히고 깨달은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참 많은 것 같다. 얼마를 더 살아야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삶·3-외상값

 

아내와 선산 장에 갔다. 선산은 몇 년 전 이태를 살았던 곳이다. 다른 곳으로 옮겨서 살면서도 간혹 선산 장을 찾아갔다. 자주 다녀 발길이 익숙한 곳일 뿐만 아니라 장이 커서 물건도 많고 밭에서 막 가져 온 듯한 채소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낙네들이 채소며 콩 종류를 조금씩 펼쳐 놓고 파는 난전을 지날 때였다.

"아지매 좀 보소!"

이마에 굵직한 주름살이 패이고 손이 큼지막한 아낙네가 아내를 불러 세웠다.

"저어게 언제고? 곧 문경 갈끼라 카면서 땅콩 사 가지고 갔지요? 그 때 돈 모자란다고 사천 원을 덜 주고 갔는데, 그라고는 다시 안 보이데요?"

"제가요!?"

"하마! 늘 내한테 자주 사 가고 했기 때문에 갖다 주겠지 하고 디렸지요. 돈 곧장 갖다 주겠다 안 캤능교?"

눈을 부라리듯 크게 뜨고 덜 준 '돈'을 다시 강조했다.

"글쎄요, 여기 있습니다."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그 아낙네에게 사천 원을 주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물었다.

"정말 그 돈 덜 준 게 맞어?"

"전혀 기억에 없어요."

"그런데 왜 선뜻 주었어?"

"사만 원이 아니라 사천 원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데요."

"?"

"생각해 봐요. 달라니 못 주겠다니 실랑이하다가 싸움이라도 나봐요. 그게 무슨 창피겠어요. 누가 옳고 그르고 간에 우세스러워 다음에 그 장판에 어떻게 가겠어요?"

"……"

 

삶·4-미득암 여인

 

미득암은 구미 천생산 정상에 있는 커다란 바위다. 천생산은 해발 407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 끝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그 바위 위에 서면 구미 시가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생산 서쪽 능선을 걸어 미득암 부근에 이른 것은 해가 저쪽 금오산 마루를 막 넘어가고 땅거미가 내려앉으려는 무렵이었다.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자면 길을 서둘러야 했다.

미득암 끝에는 웬 여인이 두툼한 겨울 외투 차림으로 목에 달린 모자를 쓰고 시가지 쪽을 향하여 앉아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소녀인지 처녀인지 부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를 보니 여성인 것만은 분명하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곧은 자세로 앉은 품이 젊은 여인 같이 느껴졌다. 곧 두터워질 어둠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빛 짙어져 가는 시가지 쪽만을 하염없이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았다. 몇 분간을 보고 있어도 그 모양 그대로다. 어둠이 짙어지려했다. 발길을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 돌아보며 산을 내려왔지만 그 여인은 좌대에 앉은 돌부처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 즐겁고 유쾌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사는 일에 대하여, 사람들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에 대하여, 그 실의와 좌절에 대하여,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나 이루어가야 할 일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나브로 어둠이 짙어져 가는 산길을 내려오면서 일말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한 인생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방관자가 된 것은 아니었는지-. (2008.11)

 

 

삶·5-아내의 삶

 

아내가 사는 것이 무척 허허한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으로 된 게 무엇이 있느냐?'며 절규한다. 뚱하게 쳐다보았더니 그악히 달려든다.

"당신과 한 평생 살면서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요? 자식들은 다 떠나가 버리고, 집이 내 것이요? 돈이 내 것이요? 당신이 내 마음 알기나 해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 앞으로 들던 적금을 해지하여 아내 앞으로 예금하고, 아내의 적금 통장 하나 만들어 주었다.

캄캄한 동굴에 조그만 구멍 하나 뚫린 것 같다고 했다.

 

 

삶·6-삶을 말하다.

 

삶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도 견뎌 내야 하는 것-안도현 '연어'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정호승 '서울의 예수'

내 삶을 사면할 이/ 그 어디에 숨었나// 칼날보다 시퍼런 세월/ 호랑이 등에 앉아// 이 뭣고 화두 하나에 마감하는 이승을.-석성우 '낙엽'

살다보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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