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밤 산길을 걸으며

이청산 2008. 11. 10. 16:06

밤 산길을 걸으며



플래시를 들고 어둠을 헤치며 산길을 오른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지난 초가을까지만 해도 퇴근하고 산에 올랐다가 땅거미가 짙어지기 전에 산을 내려 올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퇴근시간 무렵이면 바로 어둠이 내려앉는다. 퇴근 후에 동네 산을 오르는 것은 오래된 생활 습관이다. 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산을 오르고 와야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된 것 같고, 몸도 가벼운 것 같아 저녁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중독 증세인지도 모르겠다. 임지를 옮길 때마다 가까이에 산이 있을까, 하는 것이 제일 큰 관심사요, 걱정거리였다. 다행히 옮겨가는 곳마다 산이 있긴 했지만, 지금의 임지는 가까이에 일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산이 있어 더욱 좋다.

마른 갈대가 어지럽게 서 있는 산길 초입부터 어둠이 짙다. 플래시를 밝히고 수풀을 헤치며 길을 오른다. 길이 가팔라진다. 참나무 마른 잎이 서걱대며 옷깃에 와 닿는다. 발 밑에서는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푸드득! 나뭇가지 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꿩이 발소리에 놀란 듯 황급히 날갯짓한다.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컥! 평화로운 잠자리를 훼방한 것 같아 미안해지기도 한다.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길섶 소나무를 잡아당기니 마른 솔잎이 낙화처럼 떨어진다. 산등성이에 희미한 불빛이 비쳐오기 시작한다. 시가지의 현란한 불빛들이 이 먼 산자락까지 여광을 보내고 있다. 등판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매일 오르는 같은 산, 같은 길이지만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거리가 달라진다. 속상하거나 우울한 일이 많아 무거운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 날은 가파른 길이 더욱 가파르게 느껴지고 굽이로 휘어진 길이 더욱 크게 굽이져 보인다. 그러나 즐겁고 유쾌한 일과 끝에 오르는 길은 가파른 길에서도, 휘어진 길에서도 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산을 오르는 길의 거리는 땅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다. 요즈음은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참 가볍다. 별나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가벼운 일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탈이 없고 일터가 즐거운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떨어져 지내긴 하지만 나날이 예쁘게 커 가는 귀여운 손녀가 있고, 모두들 맡은 일을 열심히 해주는 일터의 고마운 사람들이 있으니 무엇을 더 욕심 낼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내 건강을 돋우기 위해 기분 좋은 땀흘리며 산을 오른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볍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정상에 오른다. 모든 것들이 한 눈에 든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을 그리고 있는 숲 저 아래 시가지는 문자 그대로 온통 불야성이다. 저 멀리 우람한 모습의 대형 공장들이 즐비하게 서있고, 대단지 아파트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높고 낮은 빌딩들이며 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시가지의 밤 풍경, 저리 찬란할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색을 다 쏟아 놓은 것 같다. 집집마다 새어나온 불빛들이 모이고, 상가며 유흥가 곳곳에서 현란하게 돌아가는 네온사인 불빛이 모이고, 거리를 흘러가고 흘러오는 자동차 불빛이 모여 시가지는 온통 활활 타오르는 불의 바다요, 활짝 피어난 꽃의 바다다. 이십여 년 전 만해도 논과 밭이 펼쳐져 있고 실개천이 흐르던 곳임을, 본 적이 없고서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그 휘황 찬란한 불빛의 위력이 산마루에까지 뻗쳐와 두꺼운 어둠살의 꺼풀 하나 살짝 걷어내어 색색 단풍의 빛깔을 은은히 드러나게 한다. 도회 근교 산의 행일까, 불행일까. 어둠 속에서도 자태를 보일 수 있어 행일까, 편히 잠들 수 없어 불행일까.

내림 길을 잡는다. 소나무, 참나무, 갈대며 넝쿨나무도 엉겨 있고 가끔씩 돌부리가 발길에 차이는 숲 속으로 든다. 불빛의 그늘은 더욱 어둡다. 플래시를 비추며 길을 더듬는다. 새삼스레 발견하는 평범한 진리 하나, 불빛은 반드시 앞을 비추되, 너무 가까이 바로 발등 쪽을 비추어서도 안 되고 너무 멀리 비추어서도 안 된다. 적당한 거리의 앞쪽을 비추어야 나아갈 길을 잘 볼 수 있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지 아니하랴.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근시안적으로 살아서도 안 되고, 멀리 내다본답시고 너무 허황한 꿈을 꾸고 살아서도 안 된다. 적절한 거리의 앞을 내다보며 적절한 안목을 가질 때 더욱 보람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플래시를 들고 한 시간 가까이 걷다가 보니 불빛이 조금씩 희미해진다. 배터리의 성능이 떨어지고 있다. 불빛이 번지는 반경도 점차 좁아지고 마침내 불빛이 콩알만큼 남아 내디뎌야 할 앞쪽의 한 점을 겨우 비출 수 있을 뿐이다. 점점 잦아지는 불빛을 따라 발길을 내딛는데 문득 우거진 숲이 앞을 가로막는다. 길이 아니다. 불빛이 넓게 비추어질 때는 길과 숲이 확연히 드러났는데, 비추어지는 범위가 좁아질수록 길과 숲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구나, 길만을 비추어서는 길인 곳과 길 아닌 곳을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구나. 사람살이도 시야를 넓게 하고 살아야 할 것임을, 외곬으로 소견 좁게 살아서는 제 길도 옳게 가기 어려운 것임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 같았다.

유쾌한 땀을 흘릴 수 있는 것이 좋아 걷는 산길이지만, 밤 산길은 하루의 일을 정리도 하게 해주고 세상살이의 일들을 돌아보게도 해주어 날이면 날마다 걷고 싶어지는 길이다.

산을 내려 왔을 때는 이마와 등판이 땀으로 흠씬 젖었다. 이 땀을 위하여 산을 오르는 것이라 생각하면 땀방울 하나 하나가 참으로 삽상하게 느껴진다. ♣(200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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