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가을 교정 -수능 수험생들을 위하여

이청산 2008. 11. 6. 10:24

가을 교정
-수능 수험생들을 위하여



교정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운동장 가에 단풍나무 잎들이 엊그제만 해도 푸른빛인 것 같았는데 어느 새 붉은 물이 깊이 들어 한 잎 두 잎 낙엽 되어 운동장을 수놓고 있다. 잔잔한 잎새로 푸름을 자랑하던 메타세콰이어도 노래지기를 거듭하다가 붉은 빛으로 변해 가고 있다. 눈을 들어 뒷산을 바라보면 붉고 푸르고 노란 색깔들이 한 데 어우러져 온 산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설악산에도 내장산에도 지금 단풍이 한창 붉게 타고 있다고 한다. 이 교정 여린 나무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거늘 큰 산 우람한 숲에서야 단풍이 오죽 아름답게 불타고 있으랴. 화려한 색깔의 향연과 더불어 새록새록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지난날의 아리따운 기억들이 되새겨지기도 하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 그리워하던 그 누가 불쑥 나타날 것 같기도 하다.

교정의 단풍이 저리 찬란히 물들고 있어도 그 고운 물빛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모른 체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수능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과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이다.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길게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짧게는 삼 년 가까이를 노심초사해 온 시간들이다.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이 행복과 불행이 거기에 달린 것 마냥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필사의 노력을 기우려왔다.

가을이면 오곡 백과가 결실을 하듯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학교에도 낭보가 잇달아 날아들었다. 어디 무슨 대학의 수시 입학 전형에 합격한 소식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그 중에 어떤 아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의 관문을 당당히 통과했다는 쾌보가 날아들어 합격한 아이는 물론 학교도 축복 속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일렀다. 수능을 치고 난 뒤에 그 등급에 따라 합격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머리띠를 더욱 힘있게 졸라 메어야 했다.

학급이 갈라졌다. 성적이 부진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과목별로 반을 나눈 것이다. 어떤 아이는 언어반으로, 어떤 아이는 수리반으로, 어떤 아이는 외국어반으로 흩어져 갔다.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아이들은 자율학습을 위해 마련된 특별 교실로 갔다. 아이들은 눈동자만 빛을 낼 뿐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이들은 한 문제라도 더 알아내야 하고, 선생님들은 한 문제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해가 지고 밤이 이슥해도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고심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고심과는 아랑곳없이 창 밖의 풀과 나무들은 시시로 빛깔을 바꾸어갔다. 푸른빛이 노란빛으로 혹은 붉은빛으로 변해 가거나 그 빛깔들이 어울려 또 다른 빛들을 연출해 내고 있다. 세상은 무르녹는 빛깔로 가을이 깊어 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지만, 교정에는 적막 속에서 달아오르는 교실의 열기로 가을이 익어 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출렁이던 들판은 서서히 검은흙이 드러나고 짚단이 논바닥에 널브러지고 있다. 감나무는 한껏 농염하게 익은 감들을 주렁주렁 단 채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추수의 일손이 바쁜 집에서는 감나무에까지 미처 손길을 뻗치지 못해 홍시가 된 감이 땅으로 내려 안고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풍요로운 가을 풍경이다. 올해는 태풍도 불지 않고 기후도 적절하여 곡식이며 과일이 모두 잘 익고 여물어 과잉 생산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결실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결실의 순간을 위하여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다. 어제는 어머니들이 찰떡을 빚어와서 아이들의 등을 토닥이어 주었다. 지금 팔공산 갓바위에는 공을 드리려는 어머니들의 발길이 넘쳐난다고 한다. 어머니들과 선생님들의 간절한 소망 속으로 교정의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바알갛게 익어 가고 있다.

저 알곡 주렁주렁한 황금 벌판처럼, 저 붉은 홍시를 빼곡이 달고 있는 감나무처럼 보람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결실의 순간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결실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현의 '연어'는 장엄한 산란의 풍경을 만들기 위해 거친 파도를 이겨내며 북태평양 베링 해를 건넜다. 아이들은 이 결실의 빛나는 풍경을 만들기 위해 길고 힘든 시간들을 인내하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자랑스런 합격증을 들고 빛나는 미래를 향하여 달려 갈 것이다. 힘차게 달려 나아갈 것이다. 그 넘쳐나는 영광을, 과속의 질주를 걱정해 보고 싶다.

파이팅! 아들이여, 딸들이여!

최후의 일각까지 다시 파이팅!♣(2008.11.5)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사를 지내며  (0) 2008.11.18
밤 산길을 걸으며  (0) 2008.11.10
제주도 돌담  (0) 2008.11.05
회갑 날에  (0) 2008.10.14
아내의 텃밭(2)  (0) 2008.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