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회갑 날에

이청산 2008. 10. 14. 13:53

회갑 날에



회갑 날이 왔다. 울릉도에서 한 해 반의 섬살이를 마치고 떠나오던 날이었다. 배를 타고 오백여 리 물길을 건너온 이튿날 저녁 어느 뷔페 식당에 모여 앉았다. 숱한 생일날 중에 하나이려니 생각했다. 옛날 명들이 짧을 때 말이지 회갑이 무슨 대수라고 그리 떠들 건 없지 않느냐며 가족끼리 조용히 미역국 상이나 차리라 했지만, 그래도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니냐며 채근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면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부를 건 없고 남매들과 가까이 있는 친지 몇 사람 불러 조촐한 자리나마 마련하자고 했다. 그 날은 마침 손녀의 두 돌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식당 입구에는 '아무개 회갑 기념연'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홀 안에는 '아무개 님의 회갑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 내가 이 세상에서 육십 년을 살았구나. 저 플래카드가 말해 주고 있지 않나! 그 플래카드가 당신은 육십 년 동안 무얼 하며 어찌 살아왔소? 하고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남매들이 오고 친지 몇 사람이 왔다. 저마다 접시 하나 들고 갖은 음식을 담아 와서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시집 간 열흔여섯 큰누나는 오지 못했다. 다리가 아파 올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광복 후 나라가 세워지던 해에 태어났고 큰누나는 정전협정이 맺어지던 해의 초봄에 대구로 시집을 갔다. 그 때 작은누나는 국민학교 상급 학년이었고 형님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큰누나가 시집가서 첫아기를 나은 이듬해에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 여동생이 쉰셋이나 되는 세월이 흐른 오늘 나는 회갑을 맞고 있다.

손녀와 나란히 앉았다. 내 앞에 놓인 시루떡 위엔 예순 한 살의 초를 꽂고 손녀 앞에 놓인 케이크 위에는 세 살의 초를 꽂아 불을 붙였다. 사람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박수를 쳤다.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잘랐다. 아내와 함께 시루떡을 자르고, 손녀와 내가 함께 손녀의 생일 케이크를 잘랐다. 아들이 아버지의 회갑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아비 어미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절을 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손녀가 무얼 아는지 저도 고사리 손뼉을 쳤다. 내가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을 갈 때가 손녀 만할 때다.

등에서 내려 걸으려고 앙탈 부리는 것을 억지로 들쳐업은 채 마구 터지는 포탄을 뒤로하며 피난길을 길을 재촉했다. 오래도록 나는 어머니 등에 입혀 있어야 했다. 그 바람에 업히는 것이 습성이 되어서인지 다 커서까지도 엄마 등을 떠날 줄 모르는 응석받이가 되었다. 손녀를 보니 부모님 애만 먹이면서 자라온 어린 시절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농사로서는 살길 마련이 힘들다고 판단하신 아버지는 내가 열 살에 들던 해 봄에 모든 것을 정리하여 고향 해평을 떠나 온 가족을 이끌고 대구로 왔다. 형님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여동생이 손녀보다 더 어릴 때였다. 참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일흔한 살 형님이 일어서서 말했다.

"…… 그 때는 모두가 다 어려웠습니다만, 우리 남매도 참 어려운 시절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늘 어리게만 생각했던 동생이 어느덧 회갑을 맞게 된 것을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면서 아이들도 충실하게 잘 키우고, 지금 한 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내일 모레는 새로운 임지로 부임합니다. 동생의 앞날에 더욱 큰 영광과 보람이 깃들기를……" 형님의 목소리는 감개에 젖어갔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가 3년 복무 후 복학했다. 졸업하기까지 다시 인고의 시간 속을 살아야 했지만, 졸업과 더불어 공립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호운과 악운, 시련과 보람이 엇바뀌면서 흘러가는 세월 속에 영양, 경주, 구미, 화원, 영해, 군위, 울릉도, 의성, 선산, 문경, 다시 울릉도를 떠돌았다. 그 사이에 결혼하여 두 아이가 나고,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제 살 길들을 찾아 결혼하고, 다시 아이가 태어나는 순환의 시간들이 쉼 없이 쌓여갔다.

태어난 무자년 그리고 다시 맞는 무자년 오늘, 삶의 한 매듭을 엮는 시간의 자리에 앉아 있다. 평생 가족밖에 모르고 살아오면서 얻은 백발을 검은 염료에 감추고 있는 아내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다. 명문 대학에서 최고 학위를 받아 연구 생활에 정진하고 있는 아들이 맑은 얼굴의 저희 아내와 어린것을 옆에 두고 앉아 있다. 멀고 가까운, 크고 작은 삶의 터를 거쳐 내일 모레 새달 새날 새 임지에 부임해야 할 내가 형제 남매, 인척들의 축복 속에 앉아 있다.

간지의 조합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회갑의 해는 참 어렵고 귀한 날일 수도 있다.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세월이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의 흐름일 뿐만 아니라, 그 세월 속에는 수많은 웃음도 무늬져 있지만 숱한 눈물도 어려 있고, 사랑과 행운도 수놓아져 있지만 갈등과 회한도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그 세월의 덩어리가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여러 갈래의 감회가 가슴속을 따뜻하게 데우기도 하고, 아리게 긁기도 한다.

세상의 햇볕을 얼마나 더 쪼일 수 있을지 모르기는 하되, 살아가야 할 앞날도 그리 짧지는 않을 것 같다. 남은 삶의 무게 또한 지나온 세월보다 결코 가볍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남은 세월이야말로 더욱 넉넉하고 여유로운 가슴으로 따뜻한 보람을 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지 않는가. 오늘 이 자리는 살아온 날을 기념하는 자리만이 아니라 살아갈 날을 위한 심기를 새로이 다지는 날이 되어야 하리라. 활기 찬 기원을 모으며 새로운 삶의 모습을 다듬는 날이 되어야 하리라.

교직 생애의 마지막 삶의 터가 될지도 모를 새로운 임지로의 부임을 앞두고 있다. 더욱 뜻 있는 보람을 새기기 위해 애쓰다가, 그 끄트머리에서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퇴임의 날을 맞이해야 할 일이다. 이제 아내와 내가 바랄 것은 오직 자유와 건강뿐이다. 자유는 삶을 더욱 보람되게 해 줄 최후의 안식처이고, 건강은 모든 것을 지켜 줄 최후의 보루이지 않은가. 건강하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건강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도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과 자유만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랴.

회갑 잔치가 끝났다. 세월의 흐름에 한 매듭을 짓는 시간이 끝났다. 사람들은 아내와 나에게 안겨 올 여생의 건강과 자유를 축원해주는 박수를 쳤다. 손녀가 '하부지!'하고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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