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제주도 돌담

이청산 2008. 11. 5. 10:56

제주도 돌담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3박4일간의 일정이었지만 온전하게 제주도를 둘러 볼 수 있었던 것은 단 이틀이었다. 그나마도 차를 타고 달리다가 명승지라는 곳에 내려 바쁜 걸음으로 몇 곳을 둘러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여유로운 시간과 마음으로 찬찬히 둘러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눈에 비치는 제주도의 모든 것들은 신기하기만 했다. 이국 땅 어느 곳을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야자수를 비롯한 무성한 열대 수목들이며, 고층 건물이 별로 없는 나지막한 집들이며, 기묘한 형상의 화산암들이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조랑말들이며, 그 말이 뛰어 노는 널따란 초원이며, 특유의 사투리며 어느 것 하나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익숙한 자연 환경이요 생활 모습이겠지만, 이방 사람들 눈엔 하나같이 경이롭기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들판과 산자락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돌담이었던 것 같다. 밭에는 밭담, 산에는 산담이 있고, 골목길에는 올레라는 돌담이 있었다. 화산 폭발에 의해 제주도는 온통 크고 작은 현무암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경작지를 일구기 시작했는데 하고많은 돌들을 처치하기가 여간 힘들고 어렵지 않았다. 돌을 들어내어 밭 가장자리로 던져 놓은 것들이 층을 이루면서 쌓여 밭의 경계선 겸 담이 되고, 그 담은 힘있는 자들이 약한 자의 밭을 잠식하려 할 때는 굳건한 방패막이가 되기도 했다.

숭숭 구멍이 나 있으면서 까칠한 표면을 가진 현무암은 흙이나 시멘트로 붙이지 않고 그대로 재어놓기만 해도 잘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돌 틈 사이로 바람도 드나들고 이웃 풍경도 보인다. 쌓여진 돌들의 실루엣이 이루는 곡선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갖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그 돌이 마을에 들면 캣담과 올레가 된다. 캣담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경계짓는 담이고, 올레는 마을 안 길에서 집 안에까지 이르는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의 나지막한 담을 말한다. 이홍섭 시인의 '서귀포'라는 시에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이라는 구절이 있다. '머리채 잡힌 야수처럼 울고 있는 당신'이란 서귀포의 모습일 것도 같고, 상상력 속의 제주 돌담일 것도 같다.

더욱 특이한 것은 무덤 주위를 정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담이다. 산담은 들판에도 있고 오름('산'의 제주도 말) 자락에서도 있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요 풍습이다. 시신을 안치하려고 하는 땅에도 돌이 많아 무덤 주위로 들어내 놓은 것이 자연스레 담이 되었겠지만, 이 담은 방목을 많이 하고 있는 소나 말들로부터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도 하고, 산불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기도 한다. 무덤의 영역을 명확히 정함으로써 조상을 숭배하는 뜻을 담기도 했다고 한다. 무덤은 영혼의 집이요, 산담은 그 집의 울타리 구실을 했다. 그 울타리에도 출입문이 있는데, 무덤을 바라보아서 남성은 오른쪽, 여성은 왼쪽을 자그마하게 틔어 놓아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삼았으니 이를 '신문(神門)'이라고 한다. 돌 많고 바람 많은 제주도만의 특별한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에서는 이 돌담을 두고 흔히 '흑룡만리(黑龍萬里)'라고 부른다고 한다. 길이가 만 리나 되는 검은 용이라는 말인데, '검은 용'이란 물론 검은 돌담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제주도의 모든 돌담을 이어 놓으면 9천7백 리쯤 될 것이라 하니 '만 리'란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 돌담에 거친 세월을 끈질기게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힘'이 깃들어 있음을 생각하면 그것을 '용'에 비유한 것도 그리 과장은 아닌 것 같다.

밭머리며 오름 자락, 마을이며 집집마다 쌓인 돌담이 오늘날은 제주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되고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정감 어린 볼거리가 되어 정서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지만, 제주 사람들에겐 관광객의 '볼거리'로서가 아니라 피땀 어린 생활 문화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땅이라고 파 보면 무덕무덕 돌무더기 돌너덜 뿐인 척박한 땅,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 하나 돌덩이를 들어내어 밭을 일구고, 들어낸 돌로 들담도 쌓고, 산담도 쌓고 집담도 쌓았으니 이 돌담에는 실로 제주 사람들의 고단한 세월이 서려 있고, 그 세월을 이겨낸 슬기가 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농토란 모두 밭뿐이다. 지반이 모두 돌로 되어 있으니 물이 고일 수 없고, 물을 댈 수 없으니 논농사란 지을 수가 없다. 제주 사람들은 그곳의 기후, 토양, 토질에 잘 자라는 마늘, 감자, 수박, 참외, 당근, 콩 등의 농작물과 여러 가지 열대 과일들 그리고 독특한 맛과 향기를 지닌 밀감을 주로 재배했다. 제주 밀감은 오늘날 제주의 한 상징이 되어 있다. 제주도를 달리는 사이에 어딜 가도 볼 수 있었던 것은 흑룡만리 검은 돌담과 함께 나지막한 나무에 오종종 달려 있는 달려 있는 노란 밀감이다. 귀를 세운 녹색 잎사귀 사이의 노란색 밀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색 돌담, 쌓아놓은 돌 틈새로 보이는 푸른 하늘, 이국 풍정을 담은 한 폭의 아름다운 유화 같다.

제주 돌담은 제주 사람들의 혼이 무르녹아 있는 제주의 한 속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속에는 제주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고, 눈물과 미소가 서려 있고, 의지와 슬기가 배어 있다. 현무암 그 숭숭 뚫린 구멍은 제주 사람들이 땀을 쏟아낸 구멍일 것도 같고, 그 거칠거칠한 거죽은 어기찬 삶을 일구느라 거칠어진 손 거죽일 것도 같다. 그 구멍, 그 거죽에서 금방이라도 따뜻한 체온이 배어 나올 듯도 하다. 돌하르방이 주먹만한 코를 달고 두툼한 입술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묵직한 질감에서는 척박한 땅을 기름진 밭으로 일구어낸 제주 사람들의 강건한 의지가, 모든 것을 껴안을 듯한 그 미소에서는 삶의 고단을 이겨낸 뒤에 안겨오는 은근한 희열감이 느껴진다.

제주 여행-. 돌담 하나 본 것으로도 삶의 새로운 의지와 희열감을 적잖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200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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