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내의 텃밭(2)

이청산 2008. 9. 30. 14:13

아내의 텃밭(2)



문을 열고 나서면 텃밭의 그 푸른 것들이 곧장 손짓하며 부를 것만 같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에겐 텃밭이 없다. 마치 이국땅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아내는 지금 텃밭 꿈만 꾸고 있다.

문경의 마성이라는 곳을 아시는가. 한참 한촌 벽지다. 탄광에서 한창 석탄을 캐내던 지난 한 시절에는 마을이 아주 번성했다지만, 지금은 거의 새소리, 바람소리만이 마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한적한 마을 한적한 곳에 학교가 있고 그 학교 안에 사택이 있는데, 방은 좁다랬지만 마당은 꽤 크고 넓었다. 낮에는 그래도 뛰어 노는 아이들이나 볼 수 있었지만 밤이면 별빛만 해말갈 뿐 무거운 적막만이 내려앉는다. 그곳에서 아내와 둘이서 살았다.

아내는 시커먼 탄진만 묻혀 있는 마당에 흙을 두 차나 들여 밭을 다듬었다. 상추씨부터 뿌리고 배추, 쑥갓, 적근대, 적오크, 청경채, 치커리, 케일, 미나리, 파, 부추, 산부추, 토란, 당근, 머위, 들깨, 파조기, 고추, 가지, 토마토, 딸기, 옥수수, 강낭콩, 박, 호박, 수박, 고구마 들을 조금 조금씩 뿌리거나 심어 나갔다. 남들은 잡풀로 여길 까마중, 참비름, 쇠비름, 참나물, 돌나물도 들판 길을 걷다가 보고는 캐어 와 심어 놓았다. 이 많은 가짓수를 다 어찌 할 것이냐 물으면 거저 키우는 재미라며 웃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고적한 한촌 벽지를 사는 아내만의 살이법이라는 것을-.

해가 뜨고 지기에 맞추어 텃밭에 들고나는 날이 거듭 되기를 두 봄 두 겨울이 지나는 나달이 흘렀을 때, 우리는 삶의 터를 울릉도로 옮겨야 했다. 동해의 유일한 섬, 절해고도다. 섬이란 어떠한 곳인가. 둘러보면 산 아니면 물뿐인 곳이다. 사방 가없는 광막한 바다 가운데 호젓하게 떠 있는 가파른 산자락, 세상의 갖은 고단과 고적이 다 모여 있는 듯한 곳이다. 사택은 산자락 깎은 자리 언덕바지에 얹혀 있었기 때문에 평지가 귀해 텃밭을 따로 둘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아내는, 비록 보자기 한 폭 만했지만 몇 포기의 푸성귀를 꽂을 수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사택에서 교사 쪽으로 가는 길섶 한 곳을 텃밭으로 일구어냈다. 집 뒷산의 잘 썩은 흙을 파 와서 지력을 돋우고, 부추와 청경채를 먼저 심었다. 문경 마성에서 가꾸던 것을 이삿짐 상자에 끼워 온 것이다. 상추, 열무, 케일, 배추, 호박, 파,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등의 씨앗이나 모종을 조금씩 구해서 묻었다. 가지, 토마토 모종은 육지를 다녀오는 길에 사오기도 했다. 거센 파도를 따라 거칠게 요동치는 배 안에서 모종을 무사히 건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푸성귀들은 아내의 손길을 따라 쑥쑥 자라났다. 바다에 파도가 부서져도, 산자락으로 바람이 불어와도 아내는 텃밭으로 뛰쳐나갔다. 눈이 내리면 내리는 족족 털어 내기도 했다. 두고 온 뭍의 일들이 그립고 궁금할수록, 외딴 섬을 사는 적막감이 가슴을 젖게 할수록 아내는 잎사귀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쏟았다. 나와 함께 하는 삶의 터에서마다 그랬던 것처럼 아내는 텃밭에다 삶의 고적을 묻어나갔다.

한 해 반의 섬살이를 마치고 뭍으로 나왔다. 새로운 삶의 터를 맞이하게 되었다. 흙을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택은 가구들이 정갈하게 갖추어진 깨끗한 빌라였다. 현관문을 열면 계단이 있고, 계단을 내려서 밖으로 나가면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진다. 빌라며 아파트가 도열해 있는 도로 가에는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다. 마트며 식당이며 주점도 있고, 은행이며 병원도 보이고 학원도 있다. 번화한 도시 동네 풍경 그대로다. 밟거나 만질 수 있는 흙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내는 먼 나라에 여행을 온 기분이라고 했다. 텃밭에 생활의 재미를 묻었던 지난날들이 꿈속의 일만 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긴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다면서, 문경에서의 생활이며 울릉도 섬살이를 꿈이었던 듯 돌이켰다. 이제 아내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무엇으로 삶의 적막을 이겨나가야 할까.

다시 꿈을 꾸기로 했다. 이제 두 해 남짓만 지나면 나도 일자리를 물러 나와 아내와 함께 적막해져야 한다. 그 때를 대비하여 풍치 좋고 인심 좋은 곳에 땅을 조금 마련하기로 했다. 어제오늘의 생각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꿈으로 그려왔다. 한 이백 평 정도의 땅을 산다. 오십 평은 대지로 쓰고, 오십 평은 마당으로 쓰고, 백 평은 텃밭으로 일군다. 아내는 밭이 조금 더 넓으면 좋겠다고 했다. 품을 사서라도 고구마와 감자며 옥수수도 심고 포도나무도 몇 그루 심고 싶다고 했다. 서울 아이들과 김장을 갈라 먹자면 배추도 제법 심어야 할 것이라 했다. 가능하면 울릉도의 명이며 부지깽이, 취나물, 삼나물도 옮겨다 심어보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지금 부지런히 텃밭을 가꾸고 있다. 날이 갈수록 푸성귀의 가짓수도 늘어나고 밭도 조금씩 넓어져 가고 있다. 너무 힘이 들지 않겠느냐고 물으면, 나와 힘을 합치면 지어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아내의 텃밭, 그 푸성귀들은 지금 아내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새록새록 자라고 있다. 새파랗게 자라나고 있다.

아내는 지난날 삶의 터였던 인심 좋고 경치 아름다운 문경 마성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내일 일요일은 마성을 다녀오자고 한다. 우리가 자리잡아 살 곳이 있을지 알아보자고 한다.♣(2008.9.27)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 돌담  (0) 2008.11.05
회갑 날에  (0) 2008.10.14
오래된 장롱  (0) 2008.09.30
새로운 삶의 터에서  (0) 2008.09.30
자전거와 안경  (0) 2008.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