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아내의 텃밭 -여기는 울릉도·40

이청산 2008. 7. 16. 10:42

아내의 텃밭

-여기는 울릉도·40



아내의 섬살이는 곧 텃밭 가꾸기였다. 사택은 학교 안 언덕바지에 서 있는 인문관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서면 건너편으로 산비탈 동네가 보이고, 그 동네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면 산자락 끝으로 바다가 펼쳐지면서 죽도와 북저바위가 보이고, 고깃배들이 도열해 있는 저동항, 그리고 방파제 위에 우뚝 서 있는 촛대바위가 눈길을 잡는다.

아내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동백나무 옆에 텃밭을 일구었다. 서너 평 남짓할까. 아내가 섬 집에 자리잡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었다. 섬의 삼월은 땅이 그리 깊게 얼어붙어 있지 않았다. 잡초를 모두 뽑아내고 주위에 자갈을 박아 밭 경계를 지었다. 그리고 집 뒷산 절개지에서 산 흙을 파 와서 부어 땅심을 돋우었다. 흙을 고르고 뭍에서 가져온 부추와 청경채를 심었다. 문경 마성의 사택 마당에서 길렀던 것을 뿌리째 파 담아 이삿짐 속에 끼워 온 것이다. 그리고 상추, 파, 열무, 케일, 배추, 호박 등의 씨앗을 한 봉지씩 사서 하나 하나 씨를 심고 가꾸어 나갔다.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등은 모종을 구해다 심었다. 가지 모종은 육지를 다녀오는 길에 사오기도 했다.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내의 텃밭에는 푸른 잎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식탁엔 늘 채소가 올라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을 텃밭에서 지냈다고도 했다. 밭은 비록 좁다랗지만 잔손길이 많이 간다고 했다.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북도 돋우어 주고, 자라는 것을 봐가며 이리 저리 옮겨심기도 하는 사이에 하루해가 언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가지를 손보고 있으면, 그 옆에 있는 것이 "나도 좀 봐 주세요.!"하고 부르는 것 같아 이것저것 돌보다 보면 해가 질 때까지도 손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받침대를 얼기설기 세워 놓은 토마토 나무가 무성해지면서 빨간 토마토가 송알송알 달리는 것을 보면 그리 예쁠 수가 없다고도 했다.

가게에 찬거리를 사러 가면 동네 사람들이 "이 섬에서 적적해서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많이들 묻는다고 한다. "아주 바쁘게 지냅니다. 하루해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라요."라고 하면 "무얼 하시는대요?"하며 의아해 한다고 했다. 아내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삼았다고 했다. 그들은 텃밭 가꾸기가 아내의 설살이법임을 알 턱이 없다. 그리 넓지 않은 학교 땅, 그 안에 있는 조그만 사택에 텃밭이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가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고 있으리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칠 년 전 첫 섬살이를 통해 섬이 원래 고적한 곳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야 가파른 산자락과 끝 모를 바다뿐인 외로운 섬, 그리고 사택이란 이웃을 잘 만날 수도 없는 섬 속의 섬이다. 한없이 외롭기만 할 섬살이-. 그래서 아내는 뭍에서부터 섬살이법을 준비해 온 것이다. 이불보퉁이를 풀자마자 쪼을 땅을 찾았다. 집 앞 언덕바지에 조그만 땅을 찾아내어 호미질을 하고, 뭍에서 가져온 부추부터 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는 섬살이의 고독을, 뭍으로 향하는 그리움을 조그만 텃밭 속에 묻어 나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아내의 텃밭은 푸르기만 했다. 섬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아 상추, 배추며 케일이 바람을 맞으면서도 잘도 자라고, 부추는 베어내기 바쁘게 새롭게 쏙쏙 올라왔다. 해가 바뀔 무렵 눈이 내렸다. 너무도 많이 내렸다. 운동장에 쌓인 눈이 허리까지 차 오를 지경이었다. 나리분지에 내린 눈은 집을 온통 다 덮어버렸다고도 했다.

"어쩌려고 눈이 이리 많이 와, 저것들은 어쩌려고!"

아내는 눈 속에 묻혀 숨도 못 쉬고 있을 푸성귀들을 걱정했다. 객지 험한 세파 속에 내어놓은 자식만큼이나 안쓰러워했다. 눈이 내리는 족족 쓸어내고 털어 내고 하면서 텃밭을 지켰지만, 자고 일어나면 두텁게 쌓인 눈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쌓인 눈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얼어버리고, 얼어붙은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그치고 햇살이 났다. 아내는 텃밭으로 달려나가 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요것 좀 봐요, 살아 있어!" 아내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경탄했다.

상추며 케일이 땅바닥에 붙은 채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이다. 색깔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험로에서 무사히 돌아온 자식을 품에 안은 것 마냥 기뻐했다.

"요것들 없으면 내 우째 살라고."

하룻밤을 자고 나니 푸성귀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두들 털고 일어났다.

그 푸성귀들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올 무렵까지 우리의 식탁을 채우고, 아내의 고적한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굴착기 하나가 언덕을 까뭉개고 올라와 아내의 텃밭에 앉아버렸다. 인문관 앞의 통로를 새롭게 축조하여 비 가림 시설을 설치하는 공사를 한다고 굴착기가 올라온 것이다. 굴착기가 올라올 만한 곳이 아내의 텃밭밖에 없긴 했지만, 그 바퀴에 짓이겨지는 푸성귀들을 보는 아내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가슴이 육중한 쇳덩이에 짓이겨지고 있는 것처럼 아파할 것 같았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학교의 땅들이 공사를 위해 이리저리 파헤쳐지고 있었다.

하루도 텃밭을 잊은 적이 없는 아내, 섬살이의 고적을 온통 텃밭에 묻고 살던 아내, 바다만 보면 곧장 멀미가 날 것 같다는 아내, 산만 보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아내-. 이제 무엇으로 섬을 살아야 할까. 바다와 산이 아닌, 다른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할까.

아내가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 뭐. 괜찮다, 뭐. 아무렇지도 않다, 뭐……."

되풀이하는 아내의 말이 조금씩 물기에 젖어 갔다.

그리고 말했다.

"학교가 잘 돼야지, 뭐"♣(2008.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