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죽도의 피아노 -여기는 울릉도·41

이청산 2008. 8. 16. 10:05

죽도의 피아노

-여기는 울릉도·41



죽도는 울릉도 저동항에서 동북쪽으로 4㎞쯤 떨어져 있는 207,869㎡(62,880평) 정도의 작은 섬이다. 80년대 중반쯤까지는 세 가구가 더덕과 소를 키우며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단 한 가구만 살고 있을 뿐인 외로운 유인도다. 높은 곳이라야 해발 일백여 미터가 될까 말까하지만 사방이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 선착장 위로 놓인 나선형 계단으로만 오르내릴 수 있다. 옛날에는 온 섬이 임야지대로 소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과 함께 대나무가 하도 많아 섬 이름조차 죽도라 하였지만, 왜인들이 마구 남벌해 버려 임야보다 경작지가 훨씬 더 넓어지게 되었다. 그 경작지에 지금은 주로 더덕을 재배하고 있다.

도동항에서 하루 두 차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있지만, 파도가 조금만 높게 일어도 운항하지 않고, 일정수의 승객이 탑승하지 않아도 출항하지 않는다. 운항하는 날보다 결항하는 날이 더 많은 것이 죽도로의 뱃길이다. 배를 타고 죽도에 닿으면 맨 처음 마주치는 것은 364층계를 돌고 돌아 올라야하는 나선형 계단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면 무성하게 우거진 대나무 숲 속에 주위의 경관과 어울리지 못해 겸연쩍게 서 있는 '자연의 하모니'라는 이름의 인공 조형물이 방문객을 맞는다.

매표소를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저 건너로 삼선암이며 관음도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하얀 양옥이 서 있다. 바다와 숲을 배경 삼아 서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다. 마당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 있고, 지붕은 짙은 고동색이지만 기둥이며 벽은 모두 하얀 색이다. 잔디밭 한 쪽에는 방문객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탁자를 갖추어 놓았고, 매장에는 주인이 직접 생산한 더덕이며, 더덕 즙을 준비해 놓고 있다. 지난날에는 관광객을 위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더덕만 판매하고 있을 뿐이다. 조리할 사람이 없어 식당은 운영할 수 없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는 주인 부부와 아들 등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주인 부부는 사십 년 전쯤 죽도에 들어와 딸 다섯, 아들 둘을 두고 농사짓고 소 먹이며, 그리고 관광객을 상대로 식당도 운영하며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딸들은 장성하여 모두 육지로 시집을 가고, 작은아들은 공무원이 되어 본섬(울릉도)으로 나갔다. 큰아들은 부모를 모시겠다며 섬에 남아 더덕 농사를 지으며 부모와 함께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명이며 전호와 같은 섬나물의 향기가 봄바람 속에 묻어오려 할 무렵, 안주인이 절벽 위에 서 있는 뽕나무에 상황버섯을 따려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바다로 추락하여 목숨을 잃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참담한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주인 부자는 죽도를 떠나려 했다. 아내,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하는 섬살이가 너무도 막막했기 때문이다. 이웃이라곤 없는 외딴 섬을 사는 일이 힘들고 외롭기도 하지만, 서른이 넘도록 혼처조차 구하지 못한 아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이 호젓한 곳에 누가 시집을 오려 할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죽도를 떠나지를 못했다. 무인도가 될 것을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고, 저 푸른 더덕 밭을 저버릴 수도 없어 차일피일 하는 사이에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작은아들도 결혼하여 본섬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살고 있건만, 마흔이 다 되어 가는 큰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고적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부자만이 살고 있는 언덕 위의 하얀 집-. 더덕 즙과 과자류 몇 가지 진열해 놓고 있는 매점 옆에는 널따란 전망 창이 달린 널찍한 거실이 있다. 안주인이 살아 있을 때는 손님맞이 식당 역할을 하던 곳이다. 깨끗하게 닦여진 마룻바닥이 빛을 내고 있는 거실 한쪽에 컴퓨터가 놓여 있고, 창 맞은편의 벽 쪽에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늙은 아버지와 노총각 아들이 살고 있는 생활 모습을 상상하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품이다.

내가 죽도를 갔던 날은 해무가 온 섬을 감싸고 있었다. 남쪽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할 저동항이며 북저바위, 북쪽으로 절경을 이루어야 할 관음도며 삼선암이 안개 속에 희미할 뿐이었다. 주위의 그림이 다 지워져버린 죽도에는 칼끝 같은 외로움이 옆구리를 쏙쏙 파고드는 듯했다. 그 언덕 위의 하얀 집에는 아들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더덕 즙을 한 잔 청하여 마시고 나니 '혼자 오셨느냐'며 한 잔을 덤으로 더 주었다. 혼자 섬에 오른 나에게 상련의 외로움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저 피아노는 누가 치는 것이냐'고 물으니, "잘 칠 줄은 모르지만, 제가 가끔 치고 있습니다."며 멋쩍은 듯 씩 웃었다.

학교 다닐 때 가끔 쳐보던 생각이 나서 몇 해 전에 들여온 것이라 한다. 바지선을 이용하여 싣고 들어와 도르래로 끌어 올렸다고 한다. 섬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은 배로 싣고 와서 선착장과 언덕 위의 집을 연결하는 도르래를 통해 올려야 한다. 공사나 일을 위한 중장비나 생활에 필요한 덩치가 큰 도구 같은 것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로는 싣지 못해 화물선을 부려 싣고 와야 한다. 운반 과정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꼭 필요한 것이면 들여오지 않을 수 없다. 저 피아노도 노총각 아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었던 것 같다.

피아노를 섬에 들여올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파도 없는 날을 가려 커다란 바지선에 싣고 물길을 달려온다. 선착장에 닿아 조심스럽게 배를 대고 들어 내린다.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가 없는 것이라 섬 밖의 여러 사람들이 와서 힘을 모은다. 도르래가 있는 곳으로 다시 옮겨 줄을 걸어 일백여 미터 언덕 위로 들어 올린다. 엘리베이터나 사다리차로 고층 아파트에 들어올리는 어려움에 어찌 비길 수가 있으랴. 묶은 줄이 풀어지거나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바위에 떨어져 박살이 나거나 수천 길 바닷속에 수장되고 말 것이다. 언덕 위에 올라와도 집 안으로 옮기기까지 또한 말할 수 없는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외롭디외로운 이 작은 섬에 피아노를 들여온 것은 어떤 생활도구보다 더 긴요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그리 긴요했을까. 오직 늙은 아버지와 노총각 아들, 단 두 사람만이 살고 있는 이 작은 섬엔 몇 날 며칠을 두고도 사람 구경을 못할 때가 많다. 섬에는 연중으로 쳐도 활짝 개어 쾌청한 날이 몇 날 되지 않는다. 바람 불고 눈비가 내리는 날이 많다. 여름에는 강풍, 태풍이 불어제치고 겨울에는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 험한 바람을 따라 파도는 섬을 뒤집어 놓을 듯이 날뛰기도 한다. 그런 날은 배가 뜰 수 없다. 이 섬을 다니는 배는 모두 작은 것이어서 물결이 조금만 일어도 운항할 수 없다. 바다가 조용해도 눈비가 내리는 날은 또 배가 다니지 않는다. 그 뿐 아니다. 운항할 만한 승객 수가 되지 않으면 결항하기 일쑤다. 이래저래 섬에 사무쳐 오는 것은 외로움뿐이다.

더덕 밭이 넓기는 하지만, 그래서 일이 힘도 들지만 그것이 삶의 고적을 메워주지는 못한다. 일이 힘들수록 본섬이 건너다보이고, 뭍의 동기간이 아리게 떠오른다. 눈비가 내리고, 파도가 높아서 섬이 고립되는 날은 더욱 그렇다. 텔레비전도 있고 컴퓨터도 있지만, 그런 것들에 어찌 마음을 담아 볼 수 있으랴. 노총각 아들은 문득 학창 시절에 즐겨 치던 피아노를 떠올렸다. 잘 치든 못 치든 무슨 상관이랴. 어떤 노래, 어떤 곡으로 건반을 두드리든 무슨 상관이랴. 웃음을 웃듯 울음을 울듯, 노래를 부르듯 고함을 치듯 건반을 두드려 보고 싶었을 것이다. 때로는 가늘고 부드럽게, 때로는 굵고 격렬하게 건반을 두르려 보고 싶었을 것이다.

며칠 무더위가 이어지더니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시원해지려나 보다하고 사람들은 비를 반기지만, 죽도 그 노총각에게도 이 비가 반가울까. 어머니의 일과 자리가 비어버린 널따란 거실 한 자리에, 덧없이 쌓여온 고단하고 고적한 섬의 시간들 위에 놓인 피아노-. 어쩌면 죽도 그 노총각은 지금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웃음 혹은 울음이 담긴, 그리움 혹은 격정이 담긴 선율로 건반을 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없이 넓은 바다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 죽도에서-.

고적한 시간들만이 무심히 쌓여가는 적막한 섬 죽도에서-.

파도가 일면 금세 지워져 버릴 것만 같은 애틋한 섬 죽도에서-.♣(2008.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