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하고많은 섬의 날 -여기는 울릉도.7

이청산 2007. 4. 30. 16:03

하고많은 섬의 날
- 여기는 울릉도·7



김 선생과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일요일에 나리분지 알봉을 함께 오르기로 했었다. 저동에서 버스를 타고 섬을 돌아 천부에 내려서, 마이크로버스에 옮겨 타고 나리분지에 올라 알봉을 등정하기로 계획을 세웠었다. 지난 섬 살이 때 다른 곳은 다 가보았는데 알봉만 올라보지 못했다고 하니, 등산 전문가인 김 선생이 특별히 나를 안내하겠다고 한 것이다.

다음 주말에도 뭍으로의 출장 일이 생겼다. 이 번 출장은 몇 가지가 겹쳐 시일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겠고, 특히 아내는 서울 아이들에게 가야할 일이 있어 언제 섬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출장 길에 오르기 전에 나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왕 나가는 김에 서울 아이들에게도 좀 갖다 주고, 언니네며 형님네와도 나누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물은 철이 있는데 지금 하지 않고 출장을 다녀오면, 세어져서 맛이 없게 되거나 먹을 수 없게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 험한 산을 혼자 오를 수도 없고, 같이 갈 사람도 없으니 내가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김 선생과 등산을 갈 것인가, 아내와 나물하러 갈 것인가. 햄릿의 고뇌보다 더 큰 갈등이 머리와 가슴을 흔들었다. 김 선생에게는 내가 먼저 가자고 해 놓고 못 가겠달 수도 없고, 아내의 청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물도 해야 하지만 사람에겐 신의라는 것이 있잖아. 나를 좀 이해해 줘야겠소. 김 선생님께 양해를 좀 구하세요. 등산은 섬 살이 하고많은 날 언제 가면 못 가나요? 나물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안잖아요?

하고많은 섬의 날! 순간 가슴이 물기로 젖는 듯했다. 그랬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섬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섬의 산과 바다는 두고두고 사랑할 날이 많이 있겠지. 상상으로 그려보면서 아껴 두고 사랑해도 괜찮겠지. 다만, 김 선생과의 약속이 문제였다. 김 선생, 미안합니다. 오늘은 천상 나물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와의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예, 산에 가는 것은 언제라도 갈 수 있잖아요. 걱정 마세요. 날이 좀더 따뜻해지고 난 다음에 가는 것도 좋지요. 나물 많이 해 오세요. 김 선생도 아내처럼 섬 살이의 하고많은 날을 말했다. 출장을 다녀와서 좋은 날 받아 함께 가자고 다시 약속했다. 이제 다시 시작한 섬 살이의 하고많은 날이 김 선생과 나의 마음을 넉넉하게 했다.

아내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오전에 올랐다가 내려와 점심을 먹고 또 올랐다. 오전에는 말잔등 쪽으로 올라 가파른 등성이를 타며 부지깽이며 취나물과 함께 삼나물을 많이 뜯었다. 오후에는 봉래폭포 옆의 산비탈을 올라 명이며 곤데서리를 많이 뜯었다. 비탈이 가파를수록 나물들이 많았다. 나물을 뜯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때로는 미끄러지기도 하며 가파른 비탈을 타는 재미도 괜찮다. 잠시 뜯어 배낭을 가득 채웠다. 맛나게 조리해서 먹기도 하고, 뭍으로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갈라줄 일을 즐겁게 상상하며 산을 내려온다.

멀고 먼 물길을 건너면서 파도와 너울을 만나 지독한 멀미에 시달리기도 해야 하고, 바람 불어 그 뱃길이 끊어지면 서늘한 외로움도 느껴야 하고, 때로는 뭍의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그리움에 가슴을 적셔야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섬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도 한다.

섬 살이는 바쁘지 않고 각박하지도 않다. 서둘러 떠나야 할 길도 있지 않고, 아옹다옹 다투어야 할 일도 별로 있지 않다. 섬을 사는 사람은 적어도 인심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섬의 산은 가파를지라도 지천의 맛난 나물이 있다. 섬을 안고 있는 광막한 바다는 그 광막한 넓이만큼이나 사람의 마음도 넓게 만든다.

섬의 아름다운 경치를 오늘 감상 못해도 늦지 않고, 함께 그 경치 속으로 가자던 약속을 못 지켜도 야속하지 않다. 바쁘지 않은 하고많은 섬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나물로 가득 채운 배낭을 지고 산을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섬의 산과 바다는 눈이 부시도록 푸르다.

하고많은 섬의 날이 있어-.(2007.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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