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아니 온 듯 다녀 가소서 -여기는 울릉도.6

이청산 2007. 4. 30. 16:01

아니 온 듯 다녀 가소서
-여기는 울릉도
·6 [섬목에서 내수전으로]



섬 길 나서기

날씨가 많이 순해졌다. 섬엔 이제야 봄이 오려나보다. '섬 길 가기'에 나섰다. 다시 섬에 온 이후 처음의 행보다. 섬의 북쪽으로 가서 남쪽으로 걸어오는 것으로 행로를 잡았다.

저동버스정류장에서 9시20분 버스를 탔다. 섬을 한 바퀴 돌아 천부에 이른 것은 10시 반, 대기하고 있는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타고 섬 길의 끝자락인 섬목을 향해 가는데, 나리분지를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섬목으로 간다고 했다. 어디를 가도 섬과 함께 하는 길인데 편하게 몸을 맡겨 두었다.

섬의 노선 버스 기사는 모두가 관광 안내원이다. 차를 몰면서 차창으로 보이는 절경마다 친절한 안내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 절경의 이름이며, 그 이름에 얽힌 유래담을 구수하게 풀어낸다. 승객 네댓 명을 태운 마이크로삼선암 풍경버스 기사도 화산의 분화구였다는 나리분지의 유래며, 저 멀리 보이는 송곳산이며, 삼선암, 관음도에 얽힌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준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절경은 언제 다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듯 다시 듣는 그 이야기도 재미나게만 들린다.

섬목에 도착하였다. 섬의 목과 같다고 하여 '섬목[島項]'이라 부르는 섬 길의 끄트머리다.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곳에 죽도와 저동의 북저바위가 보이지만, 해안 길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섬목과 저동을 잇는 길을 틔우는 것이 섬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지만, 지형이 하도 험해 언제 길이 날지 알 수가 없다. 섬에서 지형이 험하다는 것은 경치가 좋다는 뜻도 된다. 길이 난다면 그 좋은 경치가 허물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정들포의 정겨움

절벽으로 난 길을 타고 오른다. 바다 한가운데 하나의 커다란 산으로 떠있는 섬의 산중에는 길 아닌 길이 더러 있다. 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자취다. 바다를 옆구리에 낀 채, 솔가리가 융단처럼 깔린 솔숲을 올라, 자욱한 조릿대 숲을 헤치고, 섬바디 우거진 풀숲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나타나는 마을, 석포다. 산밭에 돌이 많아 '석포[石圃]'라 불렀다지만, '정들포'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섬사람들이 이 마을에 살다가 떠날 때에는 하도 깊은 정이 들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누구든 정들포의 부드러운 지형정들포에 와 보라, 그 까닭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섬의 산지란 거의가 심한 가풀막이라 쉽게 발을 붙이기 어려운데 이 마을의 지형은 너무나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좁은 곳은 통통하게 알밴 처녀의 물오른 종아리 같기도 하고, 조금 넓은 곳은 새댁의 잘생긴 엉덩짝 같기도 하고, 좀더 굽이진 곳은 여인네의 풍성한 젖무덤 같기도 하다. 지형지세가 그러할지니 그곳에 사는 사람인들 다정치 않은 사람이 어찌 있으랴. 땅에도 정이 들고 사람에도 정이 드니, 떠나려 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군부대가 닦은 섬 길

정들포의 정다운 지형에 취하다가 문득 눈길을 돌리니 산등성이로 혹은 밭 가운데로 하얗게 난 길들이 보인다. 금방 닦은 듯한 시멘트 포장길이다. 길은 평탄하고도 널찍하다. 섬에서는 제일 잘 닦여진 길일 것 같다. 예전의 섬 살이 때는 없었던 길이다. 알고 보니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부대에군 부대가 닦은 섬 길서 닦은 길이라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산중 마을인 백운동에 이르기까지 닦아 놓고 길 끝에는 군사 기지를 지어 놓았다. 섬이며 바다를 지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만든 길일 것이고, 그 길로 주민 생활도 편리를 얻을 수 있겠지만, 섬에서는 왠지 낯선 풍경으로만 느껴진다.

군부대가 있는 곳에서 북쪽을 향하니 저 건너 봉우리에 또 하얀 길이 보인다. 두루봉에 지어놓은 석포전망대다. 역시 예전 섬 살이 때는 없었던 풍경이다. 정들포 길을 내려 두루봉을 길 따라 오른다. 몹시도 가팔라 등판에 쉬이 땀이 젖는다. 봉우리 위에 오르니 정자를 지어놓고, 벤치를 놓아 섬의 풍경들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망망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삼선암이며 송곳산이 절승을 이루고, 관음도와 죽도가 감동적인 풍경을 이룬다. 언제 봐도 그 풍경들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눈물이 솟게 한다.

 

내수전 가는 길 그리고 와달리

군부대가 잘 닦아놓은 신작로를 다시 올라간다. 정들포 삼거리에 선다. 정들포와 죽암과 내수전으로 갈라지는 길이다. 길을 새로 닦는 불도저 소리가 요란하다. 군부대의 길이 이곳까지 뻗칠 모양이다. 산허리를 타고 난 길을 걸어 내수전으로 향한다. 그 길 어딜 걸어도 푸른 바다는 나뭇가지마석포에서 내수전 가는 길에 항상 보이는 죽도다 싱싱한 잎사귀처럼 걸려 있고, 죽도는 손가방 마냥 늘 곁을 따라 다닌다. 동백꽃은 지난 겨울부터 붉은 꽃을 원 없이 피워대는데, 섬단풍이며 우산고로쇠는 이제야 연록의 작은 잎새들을 내밀고 있다. 말오줌대나무도 한창 물이 오르고 있다. 길 아래위의 절벽에는 명이나물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바다 풍경, 산 풍경에 취해 한참을 걷다 보니 울릉읍과 북면의 경계 표지판이 나타난다. 산에 나무에 무슨 경계가 있을 것인가, 사람이 억지로 갈라놓은 것을.

석포와 저동이 갈라짐을 알리는 표지판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이 있다. 와달리(臥達里) 가는 길이다. 사람도 집도 없는, 이름만 남은 마을이다. 이름조차도 언젠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산 아래 바닷가 마을. 하도 가풀막이 심해 군데군데 밧줄을 메어 놓았지만, 자칫하면 수십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다. 나무에 의지하고 풀뿌리를 잡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려간다. 사는 사람은 없어도, 한 때는 섬사람들이 삶을 심었던 곳이라 조금의 체취라도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로 낭떠러지 길을 기듯이 하여 내려간다.

초병이 없는 와달리 초소옛 보던 모습 그대로다. 초병들이 바다를 지키는 초소가 있고, 한 때 초등학교 분교장이었던 폐교가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옛 그대로다. 그런 풍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물결도 옛 그대로다. 섬에 사람들이 들끓던 1960년대 말에 석포초등학교의 분교장으로 세워진 와달리 분교장은 십여 년 간 아이들을 가르쳐 오다가 1980년대 초에 폐교가 된다. 폐교로 방치된 지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삭고 낡은 잔해만이 음산하게 서 있을 뿐이다. 부서진 창문으로 바다 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죽도가 보일 뿐이다. 살던 사람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마치 종적 없이 떠나버린 크메르 왕조의 앙코르제국 사람들처럼. 그들은 앙코르와트를 남기고 가고, 와달리 사람들은 폐교만 남기고 갔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폐교의 창 너머로 보이는 죽도외롭게 서 있는 높다란 초소, 콘크리트 이층 초소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초병은 없다. 처음 섬 살이 때인 오륙 년 전만 해도 초병들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냉전 시대에는 간첩의 해안 침투를 우려하여 삼엄한 감시를 했지만, 이념의 벽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남북이 바야흐로 어깨를 결으려 하는 지금은 그런 감시의 필요도 없어진 모양이다. 무엇이 남아 있을까 하여 초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문은 녹슬었는데 초병들이 거처하던 흔적은 역력히 남아 있다. 아래층의 화장실이며 세면실, 위층의 부소대실장이며 좁다란 내무반에 더러는 초병들이 쓰던 생활 용구도 뒹굴고 있다. 커다란 냉장고도 버티고 있는데 모포 같은 것으로 덮어놓은 큼직한 무엇은 들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무반 한 귀퉁이에 게시판 하나가 달려 있는데-. 아, 나는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오늘 내가 이 호젓한 빈 초소를 찾아 올 줄 알았을까. 누가 매직으로 낙서처럼 써 놓은 글귀 하나가 내 눈길을 붙잡은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어느 초병이 쓴 것일지, 나처럼 이 초소를 찾아온 나그네가 쓴 것일지, 나를 향해 하는 말인 것 같아 가슴이 섬뜩하다. 행여 내가 다녀간 흔적이 남을까봐 발소리도 조심스럽게, 문도 조심스럽게 닫고 초소를 나왔다. 바다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는 초소를 뒤로하고 가파른 길을 되짚어 오른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등짐처럼 등판에 와 닿는다.

나의 '섬 길 가기'는 무엇인가. 섬 사랑의 길이다. 섬의 풀과 나무, 물과 바위 그리고 그것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절경에 대한 사랑의 길이다. 그 절경 속을 사는 섬사람들의 순박에 대한 흠모의 길이다. 절해고도의 고독, 그 아름다움 속을 걷는 길이다. 그러나 그 사랑과 아름다움은 나의 것만은 아니다. 섬을 사는, 섬의 품에 안기려는 모든 이들의 것일 터이다. 소리 없이 사랑할 일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사랑할 일이다. 아니 온 듯 섬 길을 걸을 일이다.

푸른 바다 위에 산그늘이 지고 있다. 섬의 날이 저물고 있다. 정매화골을 지난다. 인심 좋은 주막집에 그 주인 정매화 여인이 살았다는 곳, 전설로만 살아있는 그 여인의 정겨운 목소리가 곧장 들려 올 것만 같다. 아니 온 듯 다녀가고 싶은 그 주막을 지나 오늘 여정의 끝자락 내수전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