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섬으로 오는 길 -여기는 울릉도.4

이청산 2007. 4. 5. 17:09

섬으로 오는 길
- 여기는 울릉도·4



"3월31일 오전 5시 발표 동해남중부 해상의 일기 예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예비특보입니다. 동해중부 먼바다에는 오늘 낮에 풍랑주의보가 예상되는 가운데 해상에는 돌풍이 불고 풍랑이 높게 일겠으며……포항 울릉 항로상의 날씨는 오전에 남동 후 남서풍이 초속 9에서 14m로 불고 흐리고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겠으며 물결은 오전 1.5에서 3m, 오후 2에서 4m로 일겠습니다.……"

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섬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 지난밤부터 시시로 발표되는 일기 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몇 시간 전보다는 호전되어 가는 듯도 했지만, 지금의 예보로는 배가 뜰 수 있을 것인지 잘 판단할 수가 없다. 물결이 최고 3m라면, 웬만하면 배가 뜰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뒤이어 풍랑주의보가 내릴 것이라니 아무래도 불안하다. 하루 한 번씩 뜨는 배라 오늘 못 뜨면 섬으로 돌아가는 길이 또 하루 늦추어질 수밖에 없다.

7시는 되어야 출항 여부를 알 수 있는데, 그걸 알고 집에서 출발하면 너무 늦다. 대구에서 포항에 당도하여 여객선터미널로 가서 출항 수속을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다. 대구의 북부주차장에서 포항행 버스를 타자면 6시 반 차를 타야하고, 동부주차장에서 타면 7시에 출항 여부를 알고 차를 탈 수 있다. 그러나 집에서 동부주차장까지는 북부주차장 가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북부주차장의 6시 반 무정차를 타면 배의 출항 여부에 관계없이 포항까지 막무가내로 가야하지만, 동부주차장에서 포항으로 가는 차는 빈번하게 있기 때문에 출항 여부를 알고 차를 탈 수 있는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미명의 새벽,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택시를 불러 타고 동부주차장으로 향했다. 7시10분전쯤 주차장에 도착했다. 7시가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7시가 되었다. 여객선터미널로 전화를 걸었다.

"3월31일 여객선 운항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썬플라워호는 10시에 포항을 출항하여……" 자동으로 울려 나오는 기계음 같은 그 말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익은 인기 가수의 씩씩한 노래 소리 같이 들렸다.

재빨리 차표를 끊었다. 7시5분 차로 포항을 향해 달렸다. 빗방울이 차창에 날아 앉는가 싶더니 줄기가 되어 흘러 내렸다. 일기예보가 들어맞을 모양이다. 진회색의 하늘빛 같은 어둠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포항터미널에 내릴 때에도, 여객선터미널에 당도할 때에도 비는 계속 뿌렸다. 부두에는 바람도 세찼다. 빗줄기는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바다에는 검은 물결이 너울을 지으며 출렁거렸다.

대합실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섬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예정된 관광 일정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승객들은 신비의 섬 울릉도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에 차 있는 것 같았다.

출항을 알리는 고동 소리와 함께 선창 밖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드디어 창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해일속(滄海一粟), 아니 흑해일속이 된 배는 망망한 대해를 힘을 다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요동을 요람 삼아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갑자기 몸의 중심이 한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느낌과 동시에 눈이 떠졌다. 아직 한 시간도 채 달리지 못했다. 여기 저기서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한 듯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리고 풀썩 주저앉거나 드러눕기도 했다.

"지금 해상에는 너울성 파도가 높아 선체의 요동이 심하오니 이동을 삼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내 방송이 연거푸 울려 나왔다.

"승윤이 데려 왔으면 잠 잘 자겠지? 얼마나 호사스러워!" 아내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승윤이는 태어난 지 일곱 달 된 손녀다. 그래도 섬 살이가 처음이 아니라고, 한두 번 타보는 뱃길이 아니라고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배의 요동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요동은 쳐도 좋지만, 섬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내는 손을 모은다.

"하느님, 바다님, 제발 회항만은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의 기도는 간절했다.

배가 다시 전후, 좌우로 요동을 쳤다. 선미에서는 잿빛 물보라가 일어났다.

"이러다가 정말 회항하겠네."

"말이 씨가 된대요. 조심하세요."

"하늘 일 누가 알아!"

"기도나 하면서 겸허한 마음을 가지세요."

'겸허'라는 말이 찡하는 소리를 내며 박혀 왔다.

다시 하는 섬 살이요, 빈번하게 타본 뱃길이라고 지나치게 여유를 부릴 일이 아니다. 마치 바다와 섬을 다 아는 듯이 교만해서도 안 될 일이다. 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오늘 배가 뜨게 된 것을 하늘에 바다에 감사하며 섬으로 돌아갈 일이다.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따뜻한 인심에 감사하며 섬을 살 일이다.

배는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 연착하여 섬의 부두에 당도하였다. 섬 살이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섬 가족들과 섬과 반가운 악수를 나누었다.

섬으로 오는 길은 내 삶의 터로 오는 길이다. 늘 불안과 기대를 안고 달려오던 내 삶의 길이었다. 너울과 파도를 넘어, 그 요동을 넘어 드디어 섬으로 돌아왔다. 내 삶의 길을 '겸허'로 일깨우던 그 너울과 파도를 넘어 무사히 섬으로 왔다. 살아오면서 세상의 파도를 넘을 만큼 이미 넘었는데도 섬으로 오는 길의 파도는 가끔씩 나를 일깨운다. 나는 일깨워질 게 참 많은 사람인가 보다.

오후 바다는 풍랑주의보가 내렸다. 이튿날 아침에도 바다는 고르지 못했다. 나를 내려준 배는 하루를 건너 뛴 다음 날 오후에야 포항으로 나갈 수 있었다. ♣(2007.3.31)